문화일반

대구일보 2020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대상 - 당삼채

대상수상자 류현서
짙은 햇살이 창가에 와서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는 아침이다. 팔월 초의 날씨는 여름의 권위를 내세우기라도 하려는 듯 온 힘을 다해 적의를 뿜어댄다. 햇볕은 불덩이를 녹이는 것같이 이글거린다. 잡다한 일상을 접고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주로 향했다. 여기에도 마치 하얀 불 파도가 출렁이는 것 같다. 박물관 입구부터 햇살을 피하려는 사람들이 그늘을 찾아든다. 이런 것을 보면 자연이 천지 만물의 주인이고, 거기에 따르며 사는 사람들은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신라역사관으로 들어섰다. 소장된 문화재들이 많다. 그중에서 자그마한 항아리에 시선이 꽂혔다. 붉은색과 푸른색과 하얀색의 무늬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었다. 삼색이 어울리어 안정감을 준 무늬가 곱다. 경주에서 출토되었지만, 당나라에서 제작되었다는 항아리이다.

중국 당나라는 일찍이 ‘삼 종주국’으로 일컬었다. 도자기의 종주국, 옥공예의 종주국, 차의 종주국으로 알려졌다. 그래서인지 형태가 둥글면서 색조는 유럽풍이 깃들었다. 당시에는 유약을 바르지 않는 상태에서 800–900도의 온도를 견뎌내지 못하여 서서히 흘러내린 무늬가 당삼채다.

어찌하여 당나라의 그릇이 먼 우리나라까지 오게 되었을까. 아마 그때부터 문화교류를 한 당나라와 신라는 교역이 잦았다는 입증이 아닐까. 당삼채의 매력은 단연 색깔이다. 그만큼 신라가 문화의 다방면으로 활발했다는 증거품이리라. 당삼채는 주로 귀족이나 왕가 무덤의 부장품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한다. 특이한 도자기의 빛에서 당대의 귀족 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당삼채로 만들어진 작품은 항아리뿐만 아니라, 벼루를 비롯하여 술잔, 사발, 말, 낙타, 마부, 사자, 남녀 인물상 등이 있다고 한다.

하나의 색이 아닌 몇 가지의 색이 어우러져 아름답게 배색이 되었다. 화려하되 난분하지 않고, 호화로운 느낌을 주는 채색이 인상적이다. 역사는 기억하는 자만이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묘하다. 생각에 잠기어 그늘에 홀로 앉았다. 알록달록한 무늬가 조화를 이룬 빛을 보는 순간, 내 머릿속 세포들이 뜀박질하기 시작한다. 생각은 비어 있는 허공을 채우려는 듯, 절묘하게 배색된 빛에 온갖 상상이 춤을 춘다.

혼자 분리된 색깔이 아니라 함께 섞이어 더 고운 빛. 당삼채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근원을 읽는다. 살을 섞고 사는 부부나 그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생각이나 취향이 각자 다를 수가 있으며, 음식의 구미도 제각각일 수 있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는 엇갈리는 의견에 부딪혀 된소리도 나오고,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아 허망함을 느끼기도 한다. 자식의 실수에 얼굴을 찡그리고 남편이 하는 일이 마땅치 않아 투덜대는 날도 있다. 쇠털같이 많은 날에 함박웃음을 웃는 날이 있는가 하면, 고뇌하는 날, 때론 화들짝 놀라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럭저럭 맞추며 살아갈 수밖에.

티격태격하다가도 어려운 일이 닥치면 서로를 감싸는 게 가족이다. 자신의 고집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것 또한 인생 아니겠는가. 웃어른의 충고도 약으로 삼고 남편의 생각도 받아들이고 가족의 의견을 참작하면서, 조금씩 양보하여야 원만한 가정이 이루어진다. 남편의 뜻과 자식의 뜻과 내 뜻이 서로 합해져서 가정을 이루고 일가를 이뤄 간다. 남편과 아내와 자식이 어우러진 삼색. 그것이 바로 황색, 녹색, 백색이 배합된 당삼채 같은 빛이 아닐까 싶다.

붉은빛이 도드라지면서 푸르고 푸른빛이 선명한 가운데 흰색이 더 돋보인다. 자로 잰 것 같지 않고 격의가 없으면서 서로를 돋보일 수 있도록 떠받쳐 주고 있다. 딱딱한 느낌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고 유연하게 감싸 안아 자연스럽게 어울린 저 빛깔. 우리 인생도 부부간이나 자식에게나 저 빛처럼 서로를 떠받쳐 주어야 화목한 가정을 만들 수 있으리라.

당삼채 앞에 섰다. 이렇게 고운 그릇에 죽은 사람의 뼈를 담았다는 거다. 한 생애 동안 깃들었던 일들을 바라보듯 한참을 바라본다. 어떤 분의 육신을 담았을까. 혼은 구천을 떠돌고 무거운 육신이 담겨 있는 쉼터. 고고한 빛은 과거의 색과 현재의 색과 미래의 색이 아닐는지.

우리 인생에서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별할 수 없는 것임을. 삶과 죽음에 연결되지 않으려고 하는 한 시인이 있다. 그의 방에는 시계가 없고, 거울이 없으며, 달력이 없다고 한다. 시계가 없으니 초조함과 조급함을 모르고, 거울이 없으니 늙어가는 줄 모르며, 달력이 없으니 세월 가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절로 살고 싶다 하여 그의 호가 ‘나절로’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영원히 만나지 않으랴. 죽음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지극히 슬픈 만남인 것을. 나절로 선생도 남은 생을 혼자 능동적으로 살아낼 수 있을까. 가족이나 친지의 도움 없이 먼 여정을 가기에는 고독하지 않으랴. 누군가의 도움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누구와 대화를 나누어야 사람 냄새를 풍길 수 있을 터이다.

주름진 나의 얼굴에도, 흰 머리카락이 희끗거리기 시작한 남편의 모습에도 당삼채 같은 세월이 담겨 있다. 그 반면에, 이제 이십 대의 푸름을 내뿜는 활기찬 자식은 무슨 색을 뽐낼까. 지금은 푸른색의 저 자식도 세월 따라 이 색 저 색으로 섞이어 결국엔 당삼채의 빛으로 물들어 갈 터이다. 그리하여 세계는 분해되는 일 없이 존재하고 사람들은 각자 제자리를 지켜나가고 있다.

생(生)과 사(死)는 아무 걸릴 것 없이 돌아가고 또 돌아간다. 순환 법칙은 사람이나 만물이나 다 같아서 오면 가고 가면 오게 되는 것을. 이렇듯 우주는 쉼 없이 회전하게 되는 것이리라.

온종일 당삼채에 빠져 있다가 늦은 오후에 발길을 돌린다. 돌아오는 길에 진한 흙냄새 풍기는 들녘엔,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인생이 박혀 있다. 새색시 치마 같은 노을이 서산마루에 펼쳐졌다. 황새 한 마리 깃을 털며 너울너울 날아간다. 초록으로 물든 들판 위에 빨갛게 타는 노을 아래, 하얀 황새의 색이 더욱 선명하다. 황새가 날아간 하늘가에는 아직도 햇볕이 마지막 열기를 뿌리고 있다.

호기심 많은 내가 박물관을 찾아온 것은 역사를 기억하고 싶어서다. 붉은 노을과 푸른 들판과 하얀 황새에서 세월을 읽는다. 삼색이 어울린 자유로운 조화를 보며 인생도 당삼채 같은 빛으로 늙고 싶다. 당삼채에 담긴 세월이 곱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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