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일반

삼국유사 기행 (44) 진성여왕과 거타지

숙부 위홍과 혼인하고, 화랑들과 음란하며 국정을 보살피지 않아 신라 천년사직 기울기 시작

양산 어곡리, 임금이 머물렀던 곳이라는 뜻이다. 진성여왕릉이라는 일부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조선시대 무덤 양식으로 풀이되면서 신라시대 왕릉은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짙은 고분.
신라 51대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딸이자 헌강왕과 정강왕의 여동생이다. 진성여왕은 즉위 11년에 오빠 헌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효공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나서 6개월 만에 죽었다.

진성여왕은 경문왕의 동생, 숙부인 위홍과 부부관계를 맺었다는 기록도 있다. 하지만 부적절한 관계였으리라는 설도 있다. 위홍이 죽은 이후 진성여왕은 젊은이 2~3명을 궁 안으로 불러들여 음란하게 놀아나면서 그들에게 국정을 맡겨 정치가 혼탁해지고,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으로 나라가 기울기 시작했다.

진성여왕릉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고분 주변에 널려있는 호석 또는 판석으로 보이는 석재.
경문왕으로부터 50년간 박씨 왕가가 다시 시작된 53대 신덕왕 이전 효공왕까지 경문왕가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경문왕이 화랑과 불교 등으로 나라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헌강왕대에 잠시 번영을 이루었으나 결국 분열과 반란으로 나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 버렸다.

신라 천 년 사직을 기울게 했다는 비난을 듣고 있는 진성여왕. 삼국유사가 왕거인과 거타지 두 설화를 기록하고 있는 진성여왕조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고분의 동북쪽으로 넓게 깔려있는 석재.
◆진성여왕과 거타지

-왕거인: 제51대 진성여왕이 조정에 나간 지 몇 년 되었을 때였다. 유모 부호부인과 그 남편 위홍 잡간 등 서너 사람이 신하로서 총애를 받고 권세를 마구 휘둘러 정치가 어지러워졌다. 도적까지 들끓자 백성들이 이를 걱정하여 다라니로 은밀한 문장을 지어 길거리에 내붙였다. 왕과 못된 신하들이 이를 보고는 “왕거인이 아니면 누가 이런 문장을 지었겠느냐”고 의심했다. 그리고 왕거인을 감옥에 가두었다. 그가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였더니 하늘이 감옥을 뒤흔들었다. 이 때문에 그를 풀어주었다.

왕거인의 시는 “연나라 단이 피 흘려 우니 무지개가 해를 뚫었고/ 추연이 슬픔을 머금으니 여름에도 서리가 내렸네/ 이제 내가 길을 잃음이 예와 같으나/ 하늘은 어쩐 일로 좋은 소식 주지 않는가”라고 해석된다.

고분의 앞쪽에 두 기의 석인상이 있다. 동편의 석인상.
다라니는 “남무망국 찰니나제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바가”로 찰니나제는 여왕을 말하고,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사람의 소판을 말하는데 소판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총애받는 신하를 말하고, 부이는 부호부인을 말한다.

고분 서편을 지키고 있는 석인상.
-거타지: 진성여왕 때 아찬 양원은 왕의 막내아들이다.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백제의 해적이 뱃길을 막고 있다고 들었다. 활 쏘는 병사 50만을 뽑아 따르게 하였는데 배가 곡도에 이르자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었다. 열흘 가까이 머무르게 되자 공이 근심스러워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섬 안에 신의 연못이 있습니다. 거기에 제사를 지내면 된다고 합니다”고 했다.

연못 위에 제수를 갖추었더니 연못의 물이 한길 높이나 치솟아 올랐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공에게 “활 잘 쏘는 사람 하나를 이 섬 안에 남겨두시오. 순풍을 만나 가실겁니다”고 했다.

공이 군사 가운데 거타지라는 신하를 남겨두고 떠났다. 순풍이 홀연히 일어나니 배가 나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었다.

진성여왕 때에 시무 10여조를 국정운영 방침으로 써 올린 최치원 선생이 어릴 때 책을 읽던 곳으로 추정되는 낭산의 최치원 독서당.
거타지는 홀로 섬에 남았다. 그런데 갑자기 한 노인이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 “나는 서해의 신이오. 매일 사미승 하나가 해 뜨는 시각에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암송하며 이 연못을 세 바퀴 도는데,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르는 것이오. 그러면 사미승이 우리 자손을 잡아 간장까지 모조리 먹어치웠다오. 이제 남은 것은 우리 부부와 딸 하나뿐이오. 내일 아침 반드시 또 올 터이니 그대가 쏴 주시기 바라오.”

거타지는 숨어 엎드려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해가 떠오르자 사미승이 과연 오는데 이전처럼 주문을 외우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고 하였다. 그때 거타지가 정확히 활을 쏘자 사미승은 곧 늙은 여우로 변해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하며 “그대의 은혜를 받아 내가 목숨을 부지하였으니 내 딸로 아내를 삼기 바라오”라고 했다.

최치원이 머물렀던 곳으로 짐작해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는 남산의 북쪽 상서장. 경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노인은 자기 딸을 꽃가지 하나로 변하게 만들어 품속에 넣어 주었다. 그리고는 두 마리 용에게 거타지를 모시고 사신들이 탄 배까지 가도록 하였다. 게다가 그 배를 호위하며 당나라 국경에 이르자 당나라 사람들이 신라 배가 두 마리 용의 지킴을 받으며 오는 것을 보았다.

보고받은 당나라 황제가 “신라의 사신들은 반드시 비상한 사람들일 것이야”하고 여러 신하의 윗자리에 앉혀 잔치를 베풀어주고 금과 비단으로 후하게 상을 주어 보냈다. 귀국한 다음 거타지는 꽃나무를 꺼내 여자로 변하게 하고 함께 살았다.

상서장으로 오르는 계단. 상서장은 왕에게 글을 올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진성여왕의 사랑

진성여왕은 오빠인 정강왕의 유언으로 신라 세 번째 여왕에 즉위했다. 22세가 되던 해였다. 여왕은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의 도움으로 무사히 왕권을 이양받았다. 아버지 경문왕이 주력세력으로 육성했던 화랑 조직도 든든한 후원자가 됐다.

위홍은 경문왕의 동생으로 경문왕 집권 후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정권의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권력자로 모든 나라의 살림살이에 깊숙이 관여했다. 헌강왕이 즉위하면서부터는 상대등의 지위로 모든 국정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왕궁에 머무는 시간이 많았고, 아내가 있었지만 조카였던 진성여왕과 깊은 관계로 발전했다.

상서장 동편에 위치하고 있는 최치원 선생 사적비.
진성여왕은 어린아이였을 때부터 위홍의 아내, 숙모가 직접 키웠다. 워낙 가까이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여서 위홍이 이성적으로 조카를 만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못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깊어지고도 한참 후에야 알아차린 위홍의 아내는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같은 부인으로 지냈다.

진성여왕과 위홍은 30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진성여왕 3년에 위홍이 죽자 나라는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여왕은 직접 나라를 운영해보지 않았다. 위홍의 빈자리에 화랑 홍기와 영조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에게 나라의 일을 맡겼다.

홍기와 영조는 젊은데다 직접적인 국정 운영 경험이 없어 인사는 물론 군사, 재정 등 모든 분야에 개인적인 연고와 정실 위주로 처리했다. 진성여왕이 직접 나라를 경영해 본 경험이 없었고, 주변의 젊은 층들로 구성된 대신들조차 경험이 일천해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상서장 입구의 추모문.
실정이 이어지면서 나라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위홍의 반대세력이었던 예겸은 아들 경휘를 앞세워 내정 깊숙이 관여하면서 여왕의 퇴진을 추진했다. 예겸은 6두품 중심의 귀족들과 연대해 신라말 정치구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시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은 국정운영을 위한 지침서 ‘시무 10여조’를 지어 바치기도 하면서 중심세력의 관심을 끌었다.

진성여왕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오빠 헌강왕의 아들 ‘요’ 에게 왕위를 인계해주고, 신라 천년 왕조 최초로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는 기록을 남겼다. 여왕은 김요의 척추 두 마디가 돌출된 특이한 경문왕가의 신체적 특징을 확인하고 태자로 삼았다가 그를 왕위에 올렸다.

진성여왕 때에도 당나라와는 활발하게 교역하는 관계를 유지했다. 백제와 고려가 국가적인 형태를 갖추고 견제하는 바람에 신라는 영토적으로도 위축된 상황이었다. 뱃길도 완도 등의 가까운 길은 백제에 막혀 백령도를 이용했다. 최치원은 당나라에서 돌아와 신라 사신으로 당나라를 부지런히 오가며 나라를 위한 일에 공헌했다.

진성여왕은 직접 국정에 깊숙이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황룡사에서의 법회 등을 통해 나라의 안녕을 위한 일을 도모했다. 또 효녀 지은이에게 집을 마련해주고 곡식을 하사하는 등으로 백성을 돌보는 선정을 베푼다는 여론 형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도 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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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시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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