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27)대구농업마이스터고-110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최첨단 마이스터고

‘대한제국 융희 4년(1910년) 3월14일. 서라벌 정기받아 여기 영글어, 교남의 생명어린 달벌 옛고장, 동해 동녘 바다의 해떠온 아침, 화풍이 이 강산에 가득히 차고, 푸르른 청풍 뻗쳐 팔공 엉길제…’ 올해로 개교 110년을 맞는 대구농업마이스터고(이하 대구농림고)의 백년사 책자에 나오는 글귀 한 구절이다. 대구·경북 공립학교로는 가장 먼저 설립된 대구농림고는 1910년 3월14일 순종의 칙령 반포에 따라 학교설립 인가를 받고, 그해 5월10일 교동(구 향교)에서 정식으로 개교한다. 학교가 개교한 1910년은 우리민족에게는 영원히 잊혀 지지 않을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해이기도 하다. 바로 국권을 침탈당한 한일합병이 일어난 해다. 대구농림고는 교동(구 향교)에서 개교한지 5개월만인 1910년 10월4일 지금의 경북대사대부고 자리에 신축교사를 지어 이전하고, 다음 달인 11월에 대구공립농림학교로 정식 개칭하게 된다. 개교 당시 본과와 속성과 2개과로 나눠 모집한다. 본과는 농업·임업에 관한 전문교육을 가르치는 2년 과정이었고, 속성과는 임시 토지조사원 양성을 목표로 한 1년 과정이다. 이후 1923년 학교는 대구 신천동 현재의 쌍용화성아파트 자리를 거쳐 1955년 수성동 현재 대구교육청자리로 이전, 1981년 3월에 현재 자리인 수성구 노변동으로 다시 이전한다. 110년의 역사를 간직한 대구농림고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학교명칭도 변경을 거듭한다. 1910년 3월에 ‘대구공립농림학교’로 인가를 받은 다음, 광복 이듬해인 1946년 1월7일에 ‘대구농림중학교’로 개칭하고, 다시 한국전쟁 다음해인 1951년에 ‘대구농림고등학교’, 2000년 3월1일 ‘대구자연과학고등학교’, 2017년3월1일에 현재의 ‘대구농업마이스터고’로 교명을 개칭한다. 마이스터고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도 졸업 동문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뒷받침 된 것으로 알려졌다. 마이스터고로 전환한 대구농림고는 농업과 ICT·BT의 융·복합을 통해 새로운 성장산업 등장 및 고부가가치 창출의 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도시형 첨단농업경영 분야의 영마이스터 양성을 목표로 한다. 대학 캠퍼스에 버금가는 약10만여 평의 방대한 학교부지에 남녀학생 620여 명이 자연과 더불어 쾌적한 환경 속에서 생활한다. 이들은 전공 교과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는 한편 관련 자격증 취득, 각종 전국 대회 수상, 기업 및 공공기관 취업, 영농창업 등 다양한 부분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나타내고 있다. 대구·경북지역 공립고등학교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한 대구농림고는 2010년 5월에 개교100주년을 기념하는 동문음악회와 동문한마음체육대회를 열어 100년 역사를 기념하고 선후배간의 단합을 도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전국에서 모인 동문과 동문가족 3천여 명이 이 행사에 참여했다. 이 자리에서 총동창회는 더 높은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염원을 담은 ‘비상하는 날개를 형상화’한 100주년 기념탑 제막식을 가지고 ‘대구농림고등학교 100년사’를 발간한다. 또 한국전쟁70주년에 즈음해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한 학도의용군이 다시 한 번 주목받는다. 당시 대구농림중학교(대구농업마이스터고 전신)는 지역에서 가장 많은 140명의 재학생이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게 된다. 38회부터 41회 졸업생으로 당시 9명의 어린학생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에 총동창회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2013년 학교 교정에 참전기념비를 세웠다. 대구농림고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배출한 인물도 걸출하다. 농림고라는 교명 때문에 우리나라 농림업분야를 대표하는 인재를 주로 배출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졸업생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보기 좋게 빗나갔다. 1960년대 대구·경북지역 시장 군수의 절반이 동문이었다는 대구농림고의 정관계인맥은 화려하다. 행정 관료로는 신현돈 전 내무부장관(8회)을 비롯해 김병윤 전 농림부장관(14회), 현석호 전 국방부장관(17회), 김영준 전 농림부장관(23회), 김덕엽 전 경북도지사(29회), 박창규 전 대구시장(32회), 구자춘 전 내부무장관(39회), 이용택 전 경북관광개발공사 사장(39회), 윤우길 전 동대문구청장(46회) 등이 있다. 또 국회에는 김보영 전 의원(20회)을 필두로 권복인 전 의원(20회), 마달천 전 의원(36회), 이종식 전 의원(38회), 황병우 전 의원(38회), 황병태 전 의원(38회), 이용택 전 의원(39회), 이종진 전 의원(55회) 등이 모두 대구농림고 출신이다. 학계에서는 1913년 본과 2회를 졸업한 오장수 초대교장을 시작으로 양인석 박사(17회), 한명수 전 경북대총장(26회), 손태현 전 해양대학교총장(29회), 국문학자인 서수생 박사(31회), 김의원 전 경원대 총장(37회), 정연식 전 경북대 학장(38회), 권도혁 법학박사(39회), 송학준 전 용인대교수(42회), 도정기 전 부교육감, 경북과학대 총장(53회), 오규실 전 대구미래대교수(55회), 김인석 전 영남대 교수(57회) 등이 있다. 특히 수재로 알려진 손태현 전 해양대학교 총장(29회)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1등을 놓쳐본 적이 없었다는데 유일하게 대구농림고에서는 4등 이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손 전 총장은 영남지역 인재 양성소 역할을 했던 대구농림고에 당시 수재들이 그 정도로 많았다고 회상하며 10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모교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이 대단하다.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총동창회 행사가 열리면 부산서 대구까지 한걸음에 달려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도 대구은행장을 역임한 권승호(24회)씨와, 오동수 전 서울은행장(24회), 정달용 전 대구은행장(28회), 정재경 전 육군50사단장(43회) 등도 모두 대구농림고 출신이다. 지금도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동문으로는 소설 ‘객주’의 저자로 유명한 소설가 김주영(45회) 작가를 비롯해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을 역임한 진영환 삼익THK대표이사(52회), 한우유통업계의 성공 모델인 김치영 일품한우 대표(55회), 성서공단 이사장 추광엽 벽진바이오 대표이사(64회), 세계양봉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벌수염 사나이’로 유명한 안상규 안상규벌꿀 대표(69회), 대한민국 난초명장 이대발 연구소 소장, 이대건 관유정 대표(73회) 등이 대표적인 동문이다. 대구농림고등학교총동창회는 후배들을 위한 장학 사업에도 열성이다. 매년 신입생을 대상으로 각과별 수석입학생과 특기반 학생을 대상으로 동창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또 1987년 2월부터 출연한 금보 김영준(23회) 장학금을 비롯해 2000년 12월부터 출연한 호산 김정수(28회) 장학금 등이 해마다 주어진다. 이밖에 동문 개별 장학금으로 법률가인 백오윤(23회) 동문이 학교 악대부에 장학금으로 지원하다 작고한 후 화가인 딸이 선친의 뜻을 받들어 계속 장학금을 전달해 오고 있다. 이밖에도 1억 원을 출연한 진영환(52회) 삼익THK회장 외에 추광엽(64회) 동문을 비롯한 많은 동문들이 장학 사업에 뜻을 같이하고 있다. 1963년 결성된 대구농림고등학교총동창회는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경북 등 각 지역별 동문회를 결성해 운영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개교해 일본인 졸업생들도 다수 포함되기 때문에 재일본동창회도 조직돼 있다. 초대 총동창회 집행부는 구흥관(17회)회장과 백오윤(23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현재 24대 이정현 회장(61회)과 예병훈 수석부회장(62회)이 동문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대구농업마이스터고 이정현 총동창회장

“일제 강점기 엄혹한 시대에 태어난 우리 모교는 자랑스런 동문 선배님들이 우리나라 건국과 산업화, 민주화를 이뤄낸 국가발전의 한 축을 담당해 왔습니다. 특히 올해는 모교 선배님들이 분연히 앞장섰던 2·28운동 60주년을 맞아 총동창회도 그에 발맞춰 교정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등 여러 사업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또 후배들의 취업과 진학에 더 큰 도움이 되도록 총동창회 차원에서도 애정을 가지고 살피고 노력해 나갈 생각입니다.” 제24대 대구농업마이스터고 총동창회장을 맡고 있는 이정현 경북임업 대표이사(61회)는 개교110주년을 맞아 학교의 새로운 위상정립과 재학생들의 취업과 진학에 총동창회가 역할을 다하겠다고 전했다.아울러 올해를 기점으로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일에도 매진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교육은 백년대계’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대농의 동산’에서 농업분야를 선도하는 글로벌 인재를 키워내는 학교의 노력에 총동창회도 적극 지원할 생각을 내비쳤다. 총동창회는 대구·경북은 물론 서울과 부산 등 각 지역별 동문회를 결성해 운영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시절 개교해 일본인 졸업생들도 다수 포함돼 재일본동창회도 조직돼 있다. 이 회장은 “재일본 동창회는 해마다 일본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동문들이 모여 학창시절을 회상하고 정기적으로 모교를 방문하는 행사도 가지는 등 국적이 다른데도 끈끈한 모교사랑을 과시하고 있다”며 “이분들이 일본에 진출하는 우리 후배들에게 디딤돌이 되어 줄 수 있도록 총동창회 차원에서 연결고리 역할을 꾸준히 해 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밝혔다. 또 이 회장은 동창회원들의 노후 생활을 위한 농림고만의 특색을 살린 이색 사업도 소개했다. “은퇴한 동문을 중심으로 몇년 전부터 춘란을 키우는 ‘원명회’라는 모임을 만들었는데 지금 회원이 10여 명 된다. 동문 중에 대한민국 최고의 춘란명장이 있어 ‘원예치료’ 목적을 겸해 배우는데 노후 용돈벌이도 되고 건강에도 도움 돼 회원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다”며 “농업계 학교 특성을 살린 이런 소모임을 꾸준히 개발하는 것도 동창회가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고 소개했다. 끝으로 이 회장은 “한 세기를 넘게 이어온 대구농림고의 커다란 발자취에 걸맞도록 모든 동문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모교 발전을 위한 지원과 응원을 바라고, 110주년을 넘어 200년, 300년 그 이상을 이어갈 역사를 위해 총동창회가 한 알의 밀알이 되도록 하겠다”고 전했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1) 흥륜사 금당십성-원효와 사파

원효는 신라 금당십성으로 알려진 것 외에도 신라 불교 대중화를 이룩한 시대를 초월한 성인으로 이미 유명한 인물이다. 원효는 삼국유사에서도 여러 장에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사기 등 역사기록 곳곳에 등장한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얻은 깨달음의 과정, 요석공주와의 만남과 설총을 낳은 이야기, 기림사 설립과 혈사에서의 죽음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도술을 부리는 수준의 깨달음을 얻어 신의 경지에 이른 이야기도 여러 가지로 전한다. 오어사의 이름이 지어진 배경이 된 혜공과의 신화 같은 이야기에도 등장한다.반면 사파 또는 사복 등으로 불리는 인물은 신라십성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삼국유사 4편 의해 ‘사복이 말하지 않다’에서 원효와 함께 잠깐 언급되는 외에는 기록이 없다.이번 호에서는 원효와 사파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원효에 대한 이야기는 제4편을 소개하는 장에서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삼국유사: 사복이 말하지 않다서울(경주) 만선북리에 과부가 있었는데 남편도 없이 아이를 잉태해 낳았다.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어도 말을 하지 않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때문에 사동 또는 사복 또는 사파라고 불렀다.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때 원효는 고선사에 있었는데, 원효가 그를 맞으면서 예를 갖추었다.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그대와 내가 예전에 암소에 불경을 실었는데 지금 죽어버렸으니 함께 가서 장사를 치르자”고 했다.원효가 “좋소”라 대답하고 함께 사복의 집에 이르렀다. 원효가 시체 앞에 나아가 “나지 말라 죽는 것이 고통이니라, 죽지 말라 나는 것이 고통이니라”고 하자 사복이 “말이 번거롭다”고 했다. 원효가 다시 “죽고 나는 것이 고통이다”고 했다.둘이서 시신을 메고 활리산 동쪽으로 돌아왔는데 원효가 “지혜의 호랑이를 지혜의 숲속에 장사지내는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소”라고 했다. 사복이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에 드셨는데 지금 역시도 그와 같은 이가 있으니 연호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오”라 답했다.사복이 말을 마치고 풀을 뽑으니 아래에 세계가 생겨났다. 휘황찬란하고 깨끗하면서도 칠보로 장식한 난간과 누각이 장엄해 분명히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들어가니 그 땅이 갑자기 합쳐졌다. 원효는 이에 돌아왔다.후세 사람들이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도량사라고 했다. 매년 3월14일에 점찰회를 행하는 것을 항규료 삼았다. 사복의 교화는 오로지 이것을 보여 준 것뿐인데 세간에는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이 떠돈다.찬한다. “깊이 잠든 용을 어찌 등한시하리/ 떠날 때 읊은 한 곡 간단도 하다/ 고통스런 생사는 원래 고통이 아니니/ 연화장에 떠도는 세계가 넓기도 하다.”◆신라십성 원효와 사파-원효는 7세기에 활약한 승려로 출가 이후 환속해 무애행을 통한 정토신앙 확산에 힘쓴 인물이다. 속성은 설씨이고, 어렸을 때는 서당, 신당이라는 이름이 있다.파계하고 환속한 뒤에는 소성거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효라는 법명은 새벽이라는 뜻으로 불교를 빛나게 한다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지었다.원효는 15세에 출가, 자신의 집을 절로 지어 초개사, 태어난 곳에 사라사를 세웠다. 낭지와 혜공, 보덕 등의 선승들에게서 불법을 배우며 스스로 깨우치기 위한 고행을 했다. 한국불교사상 발달에 크게 기여해 해동보살, 해동종주라고도 불린다.고려 숙종이 대성화쟁국사 시호를 내려 지금도 분황사 터에 대성화쟁국사비를 건립했던 대좌가 남아 있다.문무왕 시대 661년 의상과 당나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당항성에서 깨달음을 얻어 돌아와 분황사에 주석하며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화엄경소 등의 100여 종 24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박으로 무애를 만들어 일체의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 한 길로 삶과 죽음을 넘어설 수 있다고 설파했다. 누구나 입으로 부처의 이름을 외우고, 귀로 부처의 가르침을 들으면 성불할 수 있다고 가르쳐 백성들이 나무아미타불을 외우게 되었다.고선사에 머물며 참선을 하기도 했다. 기림사를 창건해 머물다 혈사에서 686년 신문왕 6년 70세 일기로 입적했다. 아들 설총이 유골을 빻아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했다.발생과 소멸, 이것들이 하나이면서도 둘이며 둘이면서도 하나의 관계에 있다. 이는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실체가 없다는 것, 어떠한 실재도 없다는 것을 나름의 방법으로 극복하려 했다. 원효의 사상은 중국의 법장과 징관 등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사파: 신라 왕경의 흥륜사 금당에 소상으로 모셔진 10명의 성인 중 하나다. 사복으로도 불렸다. 사복의 정확한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가 원효와 함께 등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7세기에 활약한 인물로 추정된다.동국이상국집 23권 남행월일기에 사복은 원효의 제자로 기록하고 있다. 그의 진영이 원효와 진표의 진영과 함께 소래사에 봉안되어 있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유명 승려로 분석한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원효가 전생에서 사파를 만나다원효는 당나라 유학길에서 깨달음을 얻어 다시 신라로 돌아온 이후 전국을 떠돌며 고행의 길을 걸었다. 걸인의 행색으로 동냥을 얻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으며 농사일을 거들며 끼니를 얻어먹는 일꾼의 일도 줄곧 했다.설악산 큰 절에서 땔나무를 베어오고, 부엌의 일을 거드는 불목하니로 일을 하기도 했다. 원효가 강원도 어느 절에서 불목하니로 있을 때였다. 강원도에는 겨울에 눈이 많이 내리기 때문에 절에서는 민가와 마찬가지로 겨울에 땔 나무를 늦가을에 이미 산더미처럼 쌓아두어야 한다.그런데 그 절에 미리 불목하니로 들어와 일을 하고 있던 황소고집으로 소문 난 사복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사복은 어릴 때부터 왼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하는 불구였지만 힘이 장사이고 고집이 남달라 자신의 일을 거들어주는 것도 싫어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그의 일에는 간섭을 하려하지 않았다.한쪽 팔과 다리가 불편해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물을 길어올 때면 물동이의 절반이 출렁거리며 넘쳐 다른 사람들이 다섯 번 길어오면 될 일을 사복은 열 번은 왕복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사복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말없이 혼자 해내었다.원효가 불목하니로 들어왔을 때, 사복은 심하게 그를 구박했다. 이전에 하지 않았던 불손한 언행으로 원효를 부려먹었다. 그가 불문율처럼 행하던 물 긷는 작업과 땔 나무 베는 일도 대부분 원효에게 시켰다. 원효는 말없이 사복이 시키는 일을 해냈다. 그러고 잠자리에 들면서 늦도록 불법의 이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고집쟁이 장애인 불목하니로 관심 밖에 있던 사복은 의외로 불법에 대한 공부가 깊었다. 그의 선문답 같은 질문에 가끔 공양시간에 만나는 주지스님도 당황해 했지만 사복의 불심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차츰 원효와 죽이 맞은 사복은 겨울철 땔 나무를 준비하는 작업에도 원효와 함께 하길 즐겨했다. 아침 공양을 마친 사복은 여느 때처럼 원효를 불러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가까운 산에서는 장작을 마련할 마땅한 나무가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삐걱거리는 수레를 끌고 비탈길을 오르내리며 땔 나무를 실어 날랐지만 이골이 난 사복과 원효는 매일 수레 가득 나무를 실어왔다.늦가을 어느 날 때 이른 눈이 내린 길에 수레가 계곡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하자 사복과 원효가 매달렸지만 속수무책으로 열길 낭떠러지로 함께 떨어져버렸다. 원효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려보니 사복의 배를 뚫고 나온 썩은 대나무 줄기로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드디어 극락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구나. 다음 생에 또 만나세”라는 말을 남기며 사복은 웃음을 머금은 채 눈을 감았다. 가까스로 기운을 차린 원효는 사복의 미소 띤 죽음에서 또 깨달음을 얻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한눈에 세계여행 하기 (15) 미국 시애틀①

미국 워싱턴 주에 위치한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 최대 도시이자 낭만의 도시로 불린다. 호수와 산, 바다로 둘러싸인 시애틀의 지형적 특징은 미국의 어느 도시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 한국에서 출발할 경우 가장 먼저 도착할 수 있는 미국 관문 도시이기도 하다. 특히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스타벅스, 보잉사 등 세계 굴지 기업 본사가 이 도시에 있다. 코로나19로 반드시 방문 전 개별 홈페이지를 통해 운영 여부 및 방역 수칙을 확인하길 바란다. ◆시애틀 360도 전망할 수 있는 스페이스 니들 스페이스 니들(Space Needle)은 1962년 시애틀 세계박람회의 유산 중 하나로 시애틀의 초현대적인 아이콘이라 할 수 있다.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의 높이는 총 184m며, 160m 지점에 위치해있다. 전망대는 360도 전망으로 퓨젯 만(Puget Sound), 캐스케이드 산맥(Cascade Mountain), 올림픽 산맥(Olympic Mountain) 및 시애틀 스카이라인의 경치를 감상 할 수 있어 매년 13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 2018년에는 개장 이래 처음으로 무려 1억 달러(한화 약 1천130억 원) 예산이 투입된 시설 리노베이션 공사를 했다. 통유리 교체, 회전 바닥, 와인 바 등 최신 시설로 단장했다. 스페이스 니들 약 160m 높이 지점에 위치한 전망대는 기존 창가의 철조망을 제거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르는 전면을 통유리로 교체했다. 통유리로 교체된 전망대 및 스카이라이저(Skyrisers)에서는 관광객들이 전망대를 통해 퓨젯 만, 캐스케이드산맥, 시애틀 다운타운 등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또 전망대 외부의 벽을 따라 비스듬하게 설치된 24개의 유리 벤치인 스카이라이저에서는 아찔한 전망대 체험이 가능하다. 스페이스 니들 150m 높이에 새롭게 설치된 더 루프(The Loupe)에서는 세계 유일의 공중회전 유리 바닥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관광객들은 회전하는 유리 바닥 위를 걸으며 발 아래로 펼쳐진 아찔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으며,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이색적인 경험을 할 수 있다.더 루프가 한 바퀴 회전하는 데는 약 45분 소요된다. 전망대에 위치한 ‘아트모스Atmos) 카페’와 더 루프 층에 있는 ‘아트모스 와인 바’에서는 360도 전망의 시애틀을 조망하면서 간단한 스낵과 드링크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전망대와 더 루프에는 리노베이션을 통해 새로 설치된 오큘러스 계단(Oculus Stairs)을 통해서 이동할 수 있다. ◆시애틀 박물관, 전시관, 과학관 등 역사 깃든 명소 비행기 박물관(Museum of Flight)은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기 박물관으로 라이트 형제부터 우주선까지 비행기의 모든 역사가 살아있는 곳이다. 150개 이상의 역사적인 비행기들이 전시돼 있고,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체험관과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돼 있다. 현재는 단종 된 브리티시 에어웨이 콩코드(British Airways Concorde)와 에어포스 원(Air Force One)이 전시돼 있다. 또 퍼스널 커리지 윙(Personal Courage Wing) 구역에는 제1차와 2차 세계 대전 당시 전투기 28대가 복원돼 있는 것을 관람할 수 있다. 또 시애틀 매리너스(Seattle Mariners)의 홈 경기장, T-모바일 파크(T-Mobile Park)로 이동해 보자. 이곳은 5만 명 이상 수용이 가능하며 천장은 개폐씩 돔 지붕으로 이뤄져 있다. 경기가 없는 날에는 야구장 투어를 신청할 수 있으며, 대중에게 보통 공개하지 않는 야구장의 기자석과 특별관람석, 선수 대기석 그리고 방문자 클럽하우스 등을 볼 수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공동 창시자 폴 앨런(Paul G Allen)이 설립한 시애틀 음악 박물관(Museum of Pop Culture, MoPOP)은 음악과 첨단 기술이 접목된 전시공간이다. 로큰롤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모든 장르 음악의 창조와 혁신을 탐구할 수 있는 곳이다. 다양한 전시로 대중문화와 음악을 여러 세대가 공감하고 체험할 수 있으며 각종 악기와 음악 기기를 직접 체험해볼 수 있다. 또 다양한 장르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의 특별한 공예품과 희귀한 수집품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뮤지션들이 전하는 그들의 스토리를 통해 음악의 창작 과정을 경험해 볼 수 있다. 치훌리 가든&글래스(Chihuly Garden&Glass)는 스페이스 니들 옆에 위치한 전시관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애틀 출신 유리공예가인 데일 치울리(Dale Chihuly)가 치훌리 가든&글래스 디자인 및 기획에 참여했다. 이곳은 지금까지 아티스트 작품의 가장 포괄적인 컬렉션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방문객들은 전시홀 내부와 아웃도어 정원에서 치훌리가 직접 불어 만든 수천 점의 컬러풀한 유리공예를 감상할 수 있다. 특히 글라스하우스 천장에 전시돼 있는 1천340개의 레드, 오렌지, 노랑 색감의 유리로 만든 아름다운 구조물은 꼭 봐야 할 전시물이다. 퍼시픽 사이언스 센터(Pacific Science Center)는 1962년 시애틀 세계박람회를 위해 미국 과학 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가 박람회가 끝난 뒤 퍼시픽 사이언스 센터라는 이름으로 개관한 미국 최초의 과학관이다.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체험센터는 상설 전시관과 특별전시관으로 나눠져 있다. 상설 전시관에는 움직이는 공룡, 열대 나비의 집, 곤충 마을과 퓨젯 만 모형 등이 전시돼 있고, 각종 동물과 기술 관련 전시도 있다. 두 개의 IMAX 영화관은 최신형 3D 입체 영화관과 초대형 스크린 시설을 갖추고 있다. ◆시애틀 문화, 스포츠 등 엿볼 수 있는 이색 명소 파이크 플레이스 마켓(Pike Place Market)은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장이다. 신선한 해산물, 과일, 채소에서부터 아름다운 꽃, 맛있는 음식, 핸드메이드 기프트에 이르기까지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스타벅스 1호점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다. 검 벽(Gum Wall)에서 껌을 붙여보고, 마켓 간판 바로 아래에서는 엽서로 써도 좋을 만큼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잘 익은 베리와 글로벌 먹거리 샘플을 즐길 수 있으며, 수백 개의 가판대 사이를 걸어 보는 것도 좋다. 센추리링크 필드(CenturyLink Field)는 시애틀 미식축구팀 시호크(Seahawks)와 프로축구팀 사운더스 FC(Sounders FC)의 홈 경기장이다. T-모바일 파크와 같이 경기가 없는 날에는 팬들에게 특별관람석에 앉아 볼 수 있고, 라커룸에서 유니폼도 입어 볼 수 있는 특별한 투어를 제공한다. 이곳은 7만 명 이상 수용 가능한 곳으로, 경기가 없는 날에는 콘서트나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시애틀 아쿠아리움(Seattle Aquarium)은 4만5천 리터의 물로 채워진 수족관에 다양한 연어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물고기들을 관람할 수 있다.특히 워싱턴 본래 해양 생물들을 잠수부들과 함께 관람 감상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아름다운 산호초로 가득 찬 수족관과 다양한 종류의 해양 포유동물, 특히 돔을 따라 이동하면서 해양생물을 관찰할 수 있는 언더워터 돔(underwater Dome)도 인기다.아쿠아리움은 시애틀의 워터 프론트 59 부두에 위치해 있다. -자료 제공: 시애틀 관광청.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스토리로 만나는 경북의 문화재…안동 함벽당

함벽당(涵碧堂)은 안동시 서후면의 산골 마을에 위치한 아담한 정자이다(경북 문화재자료 제260호). 천등산 중턱에 있는 오래된 절집인 개목사를 바라고 산길을 올라가노라면, 길섶에 동남쪽을 향해 두어 길 높이의 막돌로 쌓은 석축이 보인다. 그 석축 위에 조성된 대지에 함벽당이 다소곳이 앉아 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면 높다란 석축으로 말미암아 정자가 마치 누각처럼 보이기도 한다.서쪽으로 난 작은 사주문(四柱門)을 지나 담장 안으로 들어가면 정자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특이하게도 ‘T’자형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뒤편에 3칸의 온돌방 2개를 배치하고 가운데 칸 앞으로 2칸의 대청을 앞으로 길게 뽑아 놓았다. 평난간을 두른 우물마루 대청을 맞배지붕이 덮고 있다. 보통 정자에서 흔히 보이는 건축적 장식이 거의 없고, 사용된 목재 또한 우람한 맛이 없다. 그저 작고 소박하다는 느낌만 줄 뿐이다. 화려함을 경계했던 정자를 세운 사람의 의도가 엿보인다.함벽당은 세 번에 걸쳐 주인이 바뀌었다는 유래가 전해지고 있다. 원래는 조선 명종 때의 절충장군 강희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 마을 가야촌에 살면서 처음으로 정자를 세우고 당호를 함경당(涵鏡堂)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외손자였던 북후면 도촌에 살던 옥봉 권위(1552~1630)가 정자를 물려받았다. 이 무렵 매원 김광계(1580~1646)가 인근의 봉정사를 유람하다가 함경당에 들러 친구로부터 주식(酒食)을 대접받은 일화가 그가 쓴 ‘매원일기’에 남아 있어, 함벽당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그 후 함경당은 이 마을에 살다가 문과에 급제해 내외 관직을 역임하고 귀향한 류경시(1666~1747)의 소유가 돼 후학들을 가르치고 독서하는 장소로 이용됐다.다만 당호가 함경당에서 함벽당으로 바뀐 까닭은 이렇게 전해진다. 함경당의 새 주인이 된 류경시는 주위 사람들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새로 당호를 짓기를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데 영양 주실에 살던 외종형인 옥천 조덕린(1658~1737)이 그를 항상 “함벽주인(涵碧主人)”이라 칭했고, 문생과 후학들도 류경시를 “함벽선생(涵碧先生)”이라 부르면서 정자 명칭이 어느덧 함벽당으로 정착됐고 또 류경시의 아호(雅號)로 사용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 가지 밝혀 둘 것은 현재의 건물은 창건 당시인 17세기의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류경시가 작고한 후 1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62년(철종13)에 대대적으로 중건했음이 건축 수법이나 ‘중건기’를 통해 확인되기 때문이다. 온통 천지가 짙푸른 녹음 속에 묻혀 있는 이즈음에 함벽당 난간마루에 앉아 사방을 둘러보니 “푸르름 속에 잠겨 있는 집”이라는 당호가 가진 의미가 저절로 깨우쳐진다. ▲류경시과 함벽당 둘러보기함벽당의 주인 류경시는 관향이 전주(全州)이며, 자는 흠약(欽若), 호가 함벽당(涵碧堂)으로 전주류씨 세거지인 안동 무실(水谷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고 학문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집이 가난해 솔방울에 불을 붙여 밤새 책을 읽고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니 세숫물이 먹물처럼 까맸다거나, 개목사에 들어가 ‘맹자’를 읽었는데 방에서 나와 주변의 나뭇잎을 보았더니 거기에 맹자의 글이 모두 쓰여 있더라는 일화 등이 그것이다. 아호가 천태공인 할아버지의 권유로 안동 풍산에 사는 고산 이유장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후일 강원도 원주의 우담 정시한과 안동으로 돌아 온 갈암 이현일을 찾아가 학문을 물은 바가 있어, 그들의 문인록(門人錄)에 이름이 올라 있기도 하다.류경시는 1694년(숙종20)의 갑술환국이라는 정치적 격변이 일어난 후, 폐서인이 돼 쫓겨났던 왕비 민씨(인현왕후)가 다시 왕비로 복위했음을 기념해 시행된 별시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여 환로(宦路)에 들게 됐다. 내직으로 성균관 전적, 예조좌랑, 사헌부 장령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황해도사, 평안도사를 거쳐 용강현령, 한산군수, 풍기군수, 양양부사, 순천부사를 지냈다.그는 관료로서 생활하는 동안 특히 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일화 한두 가지만 소개해 두고 싶다. 황해도사로 부임했을 때 장연에 사는 어떤 사람이 찾아와 자기 아들이 이번에 시행되는 도회시(都會試)에서 합격할 수 있게 해달라며 꿩을 뇌물로 바치자, 그를 잡아 장형을 내리고 아들은 응시를 금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 소문이 알려져 평안도사로 재임 중에 평안도의 문교행정을 관찰사로부터 전적으로 위임받았는데, 강서현령 윤순이 도회시 고시관으로 참여했다가 “이번 시험에는 사적으로 청탁하는 자가 하나도 없으니, 이 모든 것은 공의 공정함과 염치에서 말미암은 것이다”라고 칭송했다고 한다.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아빠찬스’라는 말로 빈정대며 분개해 마지않는, 자식의 좋은 학교 진학을 위해 각종 부정을 꺼리지 않았던 어느 장관 역임자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사회 기득권층의 얼굴 두꺼운 표리부동함과 불공정성과 비교할 때, 공의 이런 일화는 한여름의 시원한 샘물 같은 청량감을 우리에게 남겨준다.그는 특히 백성을 직접 다스리는 목민관으로서 부임하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후일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다.용강현령으로 재임 중의 일이었다. 용강은 중국 사신들이 오가는 교통로로서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재물을 비축해 두는 지칙고(支勅庫)가 두어져 있어, 거기에 은전 수만 꿰미가 비축돼 있었다. 이전의 현령들은 이를 유용해 백성들에게 고리로 빌려주거나 장사 자금으로 전용해 사복(私腹)를 채워왔다. 그러나 류경시는 그런 폐단을 청산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의 녹봉에서 엽전 8천 꿰미를 내놓아 믿을만한 읍내 사람 8명을 뽑아 관리하게 해 지척고의 부족분을 메꾸었다. 뒷날 영의정에까지 오른 조현명(1690~1752)이 그의 후임으로 부임했는데, 그도 이 사실을 알고 참으로 큰 은혜를 베풀었다면서 엽전 2천 꿰미를 더 보태어 백성들을 도왔다고 한다. 조정으로 복귀한 조현명은 뒷날, 류경시를 ‘당금(當今) 제일의 목민관’이라 일컬었다고 전한다.◆공정과 청렴으로 이름을 높여한편 그는 ‘문무겸재(文武兼材)’라는 평을 얻기도 했다. 그가 양양부사로 부임할 당시 강릉에서 양양에 걸친 일대에는 도적떼가 크게 번성해 조정의 큰 우환거리였다. 새로 부임하자 말자 그는 적당들이 여파령(黎婆嶺)에서 대관령(大關嶺)에 걸친 산중에 소굴을 마련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강릉태수와 힘을 합쳐 도적들을 소탕했다. 먼저 화전민 몇 사람을 포섭해 그들로 하여금 적당들을 회유하게 하는 계교를 써서 결국 적당들을 모두 체포했다. 그러나 토벌 후에는 괴수 몇 사람만 처형하고 원래 양민들인 나머지는 모두 용서해 양민이 되돌림에 그 후 강양 일대가 평안해졌다고 한다. 학문에만 뛰어난 문신이 아니라 군사 운용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728년(영조4) 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정으로부터 기호지방 병영에도 이를 대비해 군사를 훈련시키라는 명이 떨어졌다. 잠시 금강산 유람을 떠났던 그는 즉시 양양으로 복귀해 군기를 보수하고, 군사를 조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태평시대를 살았던 백성들은 진법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류경시는 밤에는 ‘육도삼략’과 ‘병학지남(兵學指南)’ 등의 병서를 강론하고, 낮에는 훈련을 시켜 5일이 지나자 제법 군용을 갖추게 됐다. 이를 직접 목격한 승지 이휘진과 정언 최규태 등이 “류공은 가히 문무겸재라 이를만하다.”라고 찬탄했다고 한다.이렇듯 함벽당은 얼핏 소박하고 자그마한 정자 건물에 지나지 않지만, 거기에는 함벽당 류경시 선생의 맑은 정신이 깃들어서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 답사 당일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신 함벽당 11대 종손 류건기(91)옹은 여전히 꼿꼿한 유자(儒者)의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전해 받은 류옹의 문집격인 ‘성헌만록(誠軒漫錄)’에 실린 각종 문장을 음미하면 유자의 풍취가 가슴에 아련히 와 닿는다. 또 선대 종손인 농포공도 퇴계학맥을 이은 근대의 선비⋅학자로서 문집인 ‘농포문고(農圃文稿)’와 1909년부터 1951년까지 40여 년 간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를 지켜보며 기록한 일기인 ‘농포일기(農圃日記)’를 남겼다. 이문기 경북대 명예교수 김창원 기자 kcw@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70) 흥륜사 금당십성-염촉과 의상

신라 역사는 불교의 발전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불교가 성했다. 신라는 불국토였다는 말 또한 역사기록 곳곳에 나타난다. 불교의 나라를 상징하듯 신라시대 고승들의 활약이 2천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전해지고 있다.신라 고승들 중에서도 흥륜사 금당벽화에 그려진 10명의 신라 유명 승려를 신라십성이라 부른다.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아도화상, 불교 공인을 위해 순교한 염촉 이차돈, 도력으로 설화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혜숙·안함, 중국에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의상 등은 동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경덕왕 때에 천계를 왕래했던 표훈, 뱀처럼 기어 다녔다는 사파, 대중 불교의 효시를 이룬 원효, 삼태기를 지고 술과 춤을 좋아해 부궤화상으로 불렸던 혜공, 당태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신라의 재상 무림공의 아들 자장 등은 서쪽 벽에 그려져 있었다.이번 호에서는 염촉 이차돈과 의상에 대한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신라의 고승: 염촉과 의상-염촉은 불교의 황무지였던 신라에 목숨을 던져 불교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이차돈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신라에서 법흥왕 이전에는 불교를 신봉하려면 몰래 섬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구려보다 무려 155년 뒤인 527년에 신라의 하급관리였던 이차돈이 불교 공인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법흥왕은 그의 마음을 가상히 여겼다. 왕은 이차돈의 “제가 저녁에 죽어 커다란 가르침이 아침에 행해지면 부처님의 날이 다시 설 것이요, 임금께서 길이 평안하시리다”는 말을 받아들였다.왕의 명령을 받고 형리가 이차돈의 머리를 베자 흰 젖이 솟아나 한 길이나 되었다. 이차돈은 순교의 흰 꽃이었다. 잘린 머리가 날아가 경주의 북쪽 산에 떨어져 거기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 순교의 거룩함을 기리는 일이 쌓여갈수록 신라의 불교는 꽃을 피웠고, 꽃 피는 불교에 따라 신라 또한 큰 나라로 발전해 갔다.신라의 불교는 신라를 신라답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신라의 역사야말로 불교를 빼놓고 생각하기 어렵다. 찬란한 신라의 문화는 불교를 바탕으로 이루어졌으며, 정치체제의 안정도 불교를 통해 이룩되었다. 쉽게 얻은 것은 귀한 줄을 모른다. 어렵게 손에 쥔 보물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고 새로운 보물을 만들어낸다. 신라에 불교가 그런 것이었다.신라 불교가 이렇듯 특별한 길을 걷게 된 데에 가장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이가 이차돈일 것이다. 불교 없이 신라가 이룩되기 어려웠다면 이차돈 없이 불교 또한 이룩되기 어려웠을 것이다.이차돈의 할아버지 아진찬 종(宗)은 습보갈문왕의 아들이었다. 아진찬이라면 신라 17관직 가운데 4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 오를 수 없는 높은 자리이다. 이차돈의 집안이 왕족이라는 설명이다.-의상의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한신(韓信)이다. 의상의 한자 표기가 義湘으로 되어 있지만 義相이나 義想으로 기록돼 있는 문헌도 있다. 625년(진평왕 47년) 경주에서 태어나 선덕여왕 때 644년 황복사에서 출가해 승려가 됐다.650년 원효와 함께 현장이 인도에서 새로 들여온 새로운 지식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 했으나 요동(당시 고구려 땅)에서 첩자로 몰려 사로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되돌아왔다.그러나 661년(문무왕 원년)에 당의 사신을 따라 뱃길로 중국 유학을 떠났고, 양주에 머무르다가 이듬해부터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의 2대 조사인 지엄선사에게서 화엄사상을 배웠다. 668년 화엄일승법계도를 저술했다.의상과 그 제자들에 의해 화엄사상은 신라 사회에 널리 확산됐고, 신라 하대에는 전국 곳곳에 화엄종 사찰이 세워졌다. 부석사, 비마라사, 해인사, 옥천사, 범어사, 화엄사, 보원사, 갑사, 국신사, 청담사 등을 화엄십찰(華嚴十刹)이라고 한다.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에도 대찰로 이름이 높다.의상의 제자인 표훈에게 화엄사상을 배운 김대성이 화엄의 세계를 형상화하기 위해 세운 불국사와 석굴암은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재로 남아 있다.의상은 702년(효소왕 11년)에 78세의 나이로 입적했다. 고려 숙종이 ‘해동화엄시조 원교국사(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라는 시호를 내렸다.삼국유사에는 의상의 전기와 함께 낙산사, 부석사 등의 창건과 관련된 여러 개의 설화가 전해진다. 중국의 송나라 때 찬녕이 편찬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도 의상의 전기가 포함되어 있다. 경남 거창 우두산의 의상봉이나 강원도 양양 낙산사의 의상대 등의 명칭은 의상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의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바로 불성의 드러남이라는 화엄사상에 기초해 현세 중심의 정토사상을 확립했다. 이를 기초로 현실 세계에 정토의 이상 세계를 구현하려는 불국토 사상은 신라의 문화적 특징으로 자리를 잡았다.불국토 사상은 외래 종교인 불교를 토착화하고, 불교가 통일 이후의 현실에서 사회 통합이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의상의 여인의상은 왕족이었다. 관리의 아들로 건장한 체격과 부티 나는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 어릴 때부터 주위의 부러움을 사며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자랐다.의상은 재주 또한 뛰어나 딸을 가진 귀족들로부터도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의상은 세상의 이치와 삶의 근원과 같은 삶의 화두를 해소하는 철학적 고민에 깊이 빠져 19세에 불가에 귀의했다.의상은 불교의 진리를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로 유학을 결심했다. 처음 원효와 유학의 길에 나섰다가 고구려에서 첩자로 오인돼 잡히면서 실패하고 신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당나라 사신이 귀국할 때 그를 길잡이 삼아 유학의 길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은 신라의 많은 여인의 가슴에 못을 박는 한을 남겼다. 남몰래 눈물로 옷고름을 적시는 여인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동경했던 여인들은 요즘 아이돌을 바라보는 10대 열혈 팬과 같았다. 그렇지만 의상은 훌훌 털고 당나라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의상의 유학길에 따라 나선 열혈 팬이 있었다. 대신의 딸 선묘 낭자는 오매불망 사랑하던 의상을 그대로 보낼 수 없어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남장을 하고, 의상의 뒤를 따라나섰다. 천리 타국에서 공부하게 될 의상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를 따라나선 것이다.의상이 당나라 땅에 내려서기 무섭게 선묘는 그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기 시작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서안에 들어선 날 선묘는 드디어 의상 앞에 나섰다. 아무도 인기척이 없는 시간을 틈타 선묘는 “서라벌에서 따라나선 선묘라 합니다. 서방님께서는 아무런 염려하지 마시고 공부에 전념하십시오. 제가 뒷수발을 들겠습니다”라며 그의 시중을 들 수 있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의상은 너무나 간절한 선묘의 청과 정성에 차마 떨치지 못하고 반승낙을 하고 말았다. 선묘는 그날부터 인정받은 의상의 그림자가 되어 살뜰히 보살피기 시작했다. 의복은 물론 신발까지 흙 하나 묻어있지 않도록 살폈다. 의상이 공부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도록 그림자처럼 붙어 수발을 드는 바람에 의상조차도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게 공부에 전념하게 됐다.의상은 드디어 당나라 조정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당나라 최고의 승려로 인정받던 지엄의 수제자가 됐다.의상은 선덕여왕의 부름을 받아 신라로 귀국했다. 선묘가 의상의 보양을 위해 소림사로 약재를 구하러 간 사이에 신라 조정에서 보낸 배는 의상을 태우고 돛을 올리고 신라로 출항했다.천만리 이국땅에 버려진 선묘는 멀어지는 의상의 배를 향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선묘의 정성을 진작 알고 있던 동해용왕은 선묘에게 신비한 힘을 불어넣어 신의 경지에 이르게 했다. 용왕의 힘을 얻은 선묘는 의상의 수호신이 되어 부석사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 터를 마련하고, 그가 입적할 때까지 돌보는 바위가 되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26) 청송중·고 총동창회

‘방광산 힘찬 줄기 뻗어 내린 곳/ 용전천 맑은 물결 우리들 배 곳/ 슬기의 보습 갈아 진리 밭 갈자/ 거룩한 보람 찾는 빼어난 우리….’청송중·고등학교는 교가처럼 방광산의 힘찬 줄기가 뻗어 내리고 용전천의 맑은 물이 학교를 감싸고 도는 청송읍 금곡리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지역 중심학교로서 미래 인재육성의 요람이다.‘성실, 협동, 봉사’라는 교훈 아래 ‘창의 인성을 지닌 미래 인재육성’을 목표로 학생들이 오고 싶어 하는 학교, 교직원이 보람과 긍지를 느끼는 학교, 지역사회와 학부모와 동창생들이 신뢰하는 학교로 성장, 발전하고 있는 학교다. ◆청송중·고 역사청송중학교는 1948년 9월20일 6학급의 청송공립농림중학교로 개교해 1951년 3월20일 청송중학교로 개칭됐다.이후 한국전쟁이 정전되고 이듬해인 1954년 6월5일 6학급의 청송고등학교를 개교했다.그러나 1961년 12월 학생 정원미달로 폐교의 아픔을 맛보아야 했다. 다행히 3년 후인 1964년 3월5일 3학급으로 복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남녀 공학이었던 청송중·고는 1974년 사립 청송여자중학교가, 이듬해인 1975년 청송여자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남자 공립 중·고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1986년 9월 본관 교사 27교실이 완공됐다. 1996년 10월 체육관, 2004년 12월 현대식 도서관이 각각 건립됐다.2007년 농산어촌 우수고 지정에 이어 이듬해 2008년 기숙형 공립고로 지정됐다. 2009년 9월 50여 명이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청운학사(기숙사)가 준공됐다.이처럼 면학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매년 20여 명 이상이 4년제 대학에 진학하는 등 지역의 중심학교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특히 2018년 도서관과 과학실 현대화 사업 완료와 동시에 교육부 지정 소프트웨어(SW)교육 선도학교로 선정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지난 2월 중학교는 70회 졸업식을 하면서 총 7천516명의 졸업생을, 고등학교는 61회 졸업식과 함께 3천322명의 동문을 배출해 국가와 지역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청송중·고 총동창회 역사청송중·고 총동창회는 46년 전인 1974년 1월 창립했다. 당시 중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윤효직 동문이 초대회장으로 취임해 활동했다.이후 2대 윤자용, 3대 황윤종, 4대 심이택 회장 등 모두 1회 졸업생이 맡아 총동창회를 이끌었다.4대 심이택 회장은 1982년 취임해 90년대 중반까지 총동창회를 이끌어 왔으나 이후 20여 년간 유명무실하게 운영되면서 그 맥이 끊어졌다.모교 개교 70주년을 2년 앞둔 2016년 11월 몇몇 동문이 모여 총동창회 재창립의 뜻을 모았다. 권오영 추진위원장을 비롯한 기수별 대표자 등 60여 명으로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이듬해인 2017년 4월8일 모교 체육관에서 정기총회를 열고 당시 한동수(중 15회) 청송군수를 고문으로 권오영(13회) 추진위원장을 제5대 총동창회장으로 상임 부회장 임경성(15회), 사무국장 윤창호(중 34회)로 하는 총동창회를 구성하게 이르렀다. ◆모교와 후배들을 위한 총동창회 활동총동창회는 모교 발전과 후배들의 진로문제에 중점을 두고 소통하고 교감하는 가운데 선후배 간 돈독한 우정을 위해 노력해 왔다.그동안 매년 입학식 때는 성적우수 입학생 4명씩을 선발해 1인당 1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70~80년대는 모교 개교기념일과 가을운동회가 열리면 동문들이 대거 참가해 후배들과 함께 뛰고 달리며 친목을 도모했다. 총동창회 재창립 이후인 지난해에는 후배들의 진로설계에 도움을 주고, 긍정적인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전문 직업인 동문들이 모교를 찾아 진로체험 특강을 실시했다.지난해 4월18일 총동창회 임경성(15회, 대구일보 부국장) 상임 부회장의 ‘미래 사회의 매스컴의 역할과 가치’라는 주제 강의를 시작으로 5월30일 당시 청송보건의료원장인 김병탁(중 25회) 동문이, 11월28일은 안동교육지원청 윤형철(30회) 장학사가 ‘꿈을 스케치하다’라는 주제로 후배들과 뜻 깊은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총동창회는 앞으로도 전문직업인 동문을 선정해 모교를 찾아 후배들에게 올바른 진로선택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진로체험 특강을 이어갈 계획이다.또 총동창회 장학회를 설립해 현재 개인이나 기수별로 지원하고 있는 장학금을 일원화하고, 지급대상을 확대해 후배들이 마음껏 꿈의 나래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의 폭을 넓혀 나간다는 복안이다.◆모교사랑을 실천하는 동기회모교의 발전과 후배들을 위한 동기회별 활동도 다양하게 펼쳐지고 있다.먼저 일육회로 청송고 16회 졸업생 60여 명으로 구성된 동기회다. 일육회(회장 김규봉)는 1975년 모교 졸업 이후 창립해 올해로 45주년을 맞는 역사를 가진 뿌리 깊은 동기회다.이들은 졸업 후 전국에 흩어져 있는 친구들과 모교 그리고 동문 소식을 알리기 위해 1981년부터 매년 ‘뿌리’라는 회지를 발간해 동문들에게 배포하고 있다. 또 ‘뿌리’ 창간을 계기로 매년 모교 개교기념일과 졸업식 참석을 비롯해 졸업생 기념 페넌트 제작 증정, 선후배 간담회, 장학금 지원 등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특히 모교가 1975년부터 매년 발행하는 학교 소식지 ‘청보’도 일육회에 의해 태동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1981년부터 10년간 발간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1991년 재발간되기까지는 일육회의 지원과 노력이 일조했다고 한다.모교 소식지 ‘청보’는 학교와 재학생들의 각종 활동은 물론 동창회와 동문들의 소식과 수필, 시, 논단 등 문학작품도 실리고 있어 총동창회의 소식지를 대변하고 있다.다음은 청송중 23회(고 17회) 동기회(회장 박지억)다.이들 동기회는 2009년 9월 모교가 기숙형 공립고로 지정돼 기숙사인 청운학사가 완공되자 후배들을 위해 이부자리 60세트(400만 원 상당)를 제작, 지원했다.특히 이들은 모교발전을 기원하며 서울에서 청송 모교까지 400여㎞를 자전거로 완주하며 장학기금을 모금해 모교에 전달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이들의 아름다운 도전은 서울에 거주하는 동기 5명으로부터 시작돼 전국으로 확산됐다. 2017년 4월29일 서울 광화문에서 출발해 양평∼충주∼문경∼안동을 거쳐 청송에 이르는 412㎞를 자전거로 완주하며 닷새만인 5월3일 모교에 도착했다.당시 회갑을 맞이한 이들은 모교가 학생 수 감소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자전거 대장정을 통해 모교사랑 장학기금 모금을 시작했다. 뜻을 같이한 전국의 동문들이 동참해 905만 원의 기금을 조성, 모교에 전달했다. 이들 회원은 매년 주왕산 산행과 골프모임을 통해 결속을 다지면서 모교사랑을 실천하고 있어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되고 있다. ◆권오영 총동창회장 인터뷰 청송중·고 총동창회 재창립과 함께 권오영 동문이 제5대 회장에 취임했다.새로운 출발점에 선 만큼 앞으로 동문들의 소통과 화합을 통한 총동창회 활성화는 물론 모교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총동창회 운영에 어려운 점이 있다면△총동창회가 재창립되면서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모든 부분에서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다.특히 농촌지역은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로 모교도 학생 수 감소로 자연스레 후배 동문의 총동창회 참여가 저조하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총회도 열지 못해 안타깝다.기수별 동기회가 잘 운영돼야만 총동창회도 탄탄하게 운영될 수 있기 때문에 동기회 활성화가 무엇보다 당면한 과제라고 할 수 있다.-동문들의 사회 활동을 소개한다면△한마디로 동문들이 지역사회 발전을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모교를 졸업한 동문이 고향에 많이 정착했다. 특히 공직사회 진출이 두드러지는 부문이다.그동안 많은 동문이 공직에서 퇴직했다. 현재도 청송군청에 사무관 이상 고위 공직자 10여 명을 포함해 80여 명의 동문이 근무하고 있다. 총동창회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모교와 총동창회를 위한 향후 계획은△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동창회로서 모교와 후배들을 지원하기 위한 재정 확보가 시급하다. 아울러 동문들의 참여가 가장 절실하다.매년 중·고 졸업생 각 1명씩을 선정해 사비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앞으로 전국의 동문들이 참여하는 장학회를 설립해 지원을 체계적으로 할 계획이다.또 동문들과 후배들이 소통하고 교감할 수 있는 행사를 기획해 앞으로 동문들이 지역사회와 모교를 위해 마음을 모을 수 있도록 하겠다.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면 동문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 화합을 통한 모교 발전에 기여하는 동창회가 되도록 노력하겠다.임경성 기자 ds5ykc@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9) 흥륜사 금당십성-아도화상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어 본격적으로 전래되기 이전부터 칠처가람이 일어나 많은 고승이 활동하는 불법(佛法)과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 신라가 불교와의 인연이 깊은 나라였다는 것은 칠처가람으로 우선 설명이 된다.전법시대의 사찰 흥륜사, 영묘사,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담엄사, 천왕사 등의 칠처가람은 이미 앞에서 다루었다.신라의 불교를 크고 깊게, 널리 알려 융성하게 일으켰던 고승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이 많다. 고승들이 행한 놀라운 이적들은 기록으로 또는 입으로 다양하게 전해지고 있다. 그들과 관련된 유명사찰도 신라의 터 곳곳에 위치하고 있거나 사라지고 없어도 설화와 같은 이야기로 더듬어 보게 한다.신라의 고승 중에도 최초의 국찰로 전해지는 흥륜사의 금당에 벽화로 그려져 있었던 열명의 고승, 신라 십성으로 불리는 승려들의 이야기를 더듬어 본다. 이번 호에서는 신라에 가장 먼저 불교를 전했던 아도화상과 안함을 만나본다. ◆삼국유사: 흥륜사의 금당 십성동쪽 벽에 경(庚)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서쪽 벽에 갑(甲) 방향으로 앉은 분, 진흙으로 만든 소상이다.표훈, 사파, 원효, 혜공, 자장. ◆신라의 고승: 아도화상과 안함-아도화상: 신라에 최초로 불교를 전한 승려로 전해지는 아도화상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아도는 아두라고도 불리며 고구려에 순도가 처음 불교를 전하고 2년이 지난 시기에 고구려에 들어와 불교를 전파한 인도의 승려라는 설이 있다.또 그의 국적은 분명하지 않으며 눌지왕 때에 고구려에서 신라로 들어와 불교를 전파했다. 따르는 승려 3명과 지금의 구미지역 모례의 집에서 머물다 죽었다고도 전한다.이어 삼국유사에서 아도는 고구려의 사신이 신라에 와 머물며 신라의 여인과 사이에 탄생해 16세에 고구려로 들어가 아버지를 만나 불교를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아도가 불법을 전파하다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펴지 못하고 모례의 집에서 땅굴을 파고들어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구미시 해평면에는 아도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리사가 있다. 도리사는 아도가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만발한 곳에 절을 지어 그렇게 부른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법등이 이어지고 있다.도리사에는 보물 제470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아도화상의 석상, 사적비, 탱화, 세존사리탑 등의 문화유적이 있다. 아도화상의 석상은 높이 1m에 이르는 입상으로 윤곽이 뚜렷하며 기이한 느낌을 준다.세존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는 무색투명하고 둥근 콩알 크기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사리 중에서는 가장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이 외에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이 좌선했던 바위로 전해지는 편편하게 다듬어진 좌선대, 아도화상이 입적한 곳이라는 금수굴 등이 있다. -안함(安含)은 신라의 왕권이 안정되지 못하고 여전히 귀족들의 세력에 따라 나라의 정책이 운영되던 진지왕시대에 태어나 왕권안정을 찾아가던 진평왕 시대를 지나 선덕여왕 9년에 입적한 고승이다.안함은 흥륜사 십성 중의 한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진평왕 22년인 600년에 고승 혜숙과 함께 이포진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되돌아왔다. 이듬해 칙명을 받고 법사가 되어 중국 사신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서 황제를 만나 뜻을 전하고 대흥사에 머물렀다.중국에서 십성에 이르게 한 비법과 현의와 진문을 5년 동안 배우고 605년에 우전국의 비마진제, 농가타 등의 서역 승려들과 함께 귀국했다. 신라에 서역의 승려들이 들어온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안함은 황룡사에 머물면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을 번역했는데 승려 담화가 이를 필수했다. 저서로는 견문록 참서(讖書) 1권을 저술했으나 전하지 않는다. 또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 1권을 저술했는데 그가 안홍(安弘)이라는 설도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 아도화상의 환생-아도화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이겼으나 거짓 항복한 신라 장수의 배신으로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아도는 신라에 태어나 그 신라 장군의 후손들에게 복수할 것을 다짐했다. 결국 아도는 신라를 방문한 고구려 대신이었던 아버지 힘을 빌려 신라에서 다시 태어났다.그러나 아버지 아굴마가 고구려로 돌아가 버리자 어린 아도를 돌봐줄 힘이 부족한 어머니에게서 제대로 무술수업을 받지 못해 꿈을 이룰 수 없었다. 아도는 먹고살기에도 어려워 겨우 글을 깨치는데 급급할 정도였다.어머니는 아도가 답답해하자 16살이 되던 해에 고구려로 가서 아버지를 찾아 뜻을 펼치라고 주문하며 아버지와의 약조와 증표를 전해 주었다. -아도의 아버지 아굴마는 고구려 조정의 중요인물로 성장해 나라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 아도는 어렵게 아버지 굴마를 만났다.굴마는 아도의 자질이 뛰어남을 알아보고 이름이 높았던 현창화상에게 아도를 보내 불법을 공부하게 했다. 아도는 삶의 참 이치를 깨달으며 복수에 대한 마음을 까마득히 잊고, 백성들의 깨우침을 인도하기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고구려에서 5년여 불법에 대한 공부를 익힌 아도는 아버지의 권유로 다시 신라로 돌아왔다. 아도는 어머니를 찾아가 아버지와의 만남과 공부한 내용을 낱낱이 전하고 신라 백성들을 위해 불법을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알렸다.어머니의 동의를 얻은 아도는 궁궐로 들어가 불법을 전파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불교의 진리에 대해 어두웠던 궁중에서는 귀족들의 눈치를 보며 오히려 배척하고, 아도를 죽여야 한다는 여론에 휘말려 오히려 핍박하게 됐다.그러던 중 왕비가 이름 모를 병에 걸려 먹지도 못하며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왕은 전국에 방을 내려 왕비의 병을 고치는 사람에게는 3년간 세비를 면해주고, 큰 집을 하사한다고 했다. 그렇지만 용하다는 의원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을 고치지 못했다. 이러한 사정을 들은 아도가 궁으로 들어가 왕비의 병을 고쳤다. 아도는 고구려 현창화상에게서 마음의 병을 고치는 도력에 대해서도 배움을 얻어 이미 도력이 뛰어나 그가 마음먹은 일은 작은 산이라도 가볍게 옮길 수 있었다. 왕비의 병을 낫게 해주었지만 왕의 후의에 반해 귀족들은 여전히 불교와 아도화상을 업신여기며 불교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결국 아도는 신라 궁궐에서 불교를 전파하려던 꿈을 포기해야 했다.궁궐에서 사당을 지어놓고 선대왕들에 대한 제를 올리는 일을 담당하던 세력의 핍박은 노골적이어서 아도가 견디기 어려웠다. 제대로 뜻을 펴지 못한 아도는 궁궐에서 도망해 구미로 발길을 옮겨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어우러진 곳에 도리사를 짓고 암암리에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했다.그러나 끈질긴 신라 귀족들의 불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아도는 후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승려로 환생해 불법을 온 백성들에게 전파하는 일을 할 것을 다짐하며 굴을 파고 입적에 들었다.-원효로 환생: 아도는 원효로 환생했다. 처음 화랑이 되어 전쟁터를 전전하며 장군으로 눈길을 끌게 됐다. 그러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갑옷을 벗은 원효는 삶과 죽음에 대해 고뇌하기 시작했다. 원효의 고민이 깊어지면서 전생에서 백성들에게 불법을 전하기로 했던 뜻을 생각해내고 불법공부에 매진했다. 아도는 고구려는 어떻게 변화했을까 궁금해졌다. 그래서 의상을 대동하고 유학을 떠났다가 첩자로 오인받아 구속되기도 했지만 가까스로 신라로 돌아와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위해 화쟁사상을 전파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아도는 삼생에 거쳐 그리던 불법을 만천하에 전하는 일을 해내는 훌륭한 승려로 후대에 이름을 전하고 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25) 경북중·고

‘TK(대구·경북) 인맥의 산실’.경북중·고등학교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고교 비평준화(1958년생 이전) 시절, 영남권 수재들이 모두 모여드는 명문고의 상징이었다.세 줄의 흰 선(백삼선, 白三線)이 새겨진 교복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었을 정도다.실제 ‘경북고 80년사’(1996년 발행)에 나온 1970년대 경북고 출신 학생의 서울대 진학 기록을 보면 비평준화 마지막 세대인 53~58회(71~76학번)의 서울대 진학자 평균은 연 135명에 이른다.이에 비단 TK뿐만 아니라 전국을 통틀어도 기라성 같은 인물이 대거 배출됐다.경북중·고는 평준화 확산 이후에도 대구의 강남 8학군인 수성구로의 학교 이전을 통해 공립명문고로서 전통을 잇고 있다.◆121년의 역사경북중·고교의 역사는 올해로 121년이 됐다.4년 전 까지 경북중·고의 뿌리는 일제강점기인 1961년에 설립된 대구고등보통학교로 알려져 있었다.하지만 2016년 당시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던 총동창회가 1899년(대한제국 3년) 대구에 세워진 달성학교 설립 취지 및 교칙을 담은 문건을 기증받아 경북중·고와의 연관성을 확인하면서 개교 역사가 117년으로 늘어났다.심상과와 고등과를 둔 4년제 달성학교는 지방관과 대구의 유지들이 돈을 모아 함께 세운 사립학교로 영남 최초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다. 일제 식민교육정책에 항거하는 구국운동을 위한 학교였다.이후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교육정책도 식민지화 과정에 맞게 개편했고 달성학교의 심상과는 대구공립소학교로 인계하고, 고등과는 서상돈, 양기탁, 정재학 등이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중에서 일부를 자금으로 1907년에 개교한 협성학교에 흡수시켰다.조선총독부는 고등보통학교의 관제를 제정해, 협성학교를 관립대구고보에 병합시켰고 1916년 4월 대구고보는 협성학교의 학생과 물품을 인수하는 한편 신입생을 선발해 개교했다.경북중·고가 1899년에 설립된 달성학교와 여기서 전환된 협성학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학교의 인적·물적 토대가 영남의 선각자·유림들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1919년 3.1 운동 당시(대구는 3월 8일)에는 대구고보 전교생 239명 중 200여 명이 참가, 대구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며 항일동맹휴학·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발표사건·비밀결사사건 등 민족정기를 밝히는 항쟁에도 앞장섰다.확인된 항일투쟁가만 38명이다.6.25 전쟁 때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북중 32~34회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에 지원했다. 전사자가 53명에 이르며, 이 학도병을 기리는 조형물이 2.28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옆 호국동산에 세워져 있다.1960년 2·28 민주운동 때는 경북고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해 대구고, 경대사대부고 등 여러 고교 학생들과 함께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 거리로 뛰쳐나가기도 했다.2·28 민주운동은 이후 3·15 마산의거, 4·19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해 민주화운동의 시초가 됐다.◆자랑스런 경맥인경북중·고는 TK는 물론 전국에서도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특히 노태우(32회 졸업) 전 대통령을 비롯해 이효상(4회)·박준규(25회)·김수한(29회) 전 국회의장, 김용철(26회) 전 대법원장 등 삼부요인을 전국에서 처음 배출한 고등학교로 이름을 올렸다.이후 경기고, 경남고 등지에서 삼부요인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신현확(20회) 전 국무총리도 경북고를 나왔고 관계는 물론 대법관, 헌법재판관, 검찰총장 등을 포함한 법조계에도 이 학교 출신이 손으로 꼽기 어려울 만큼 숱하다.21대 국회까지 경북고를 나온 국회의원 수만도 연인원으로 따지면 182명이다. 특히 1996년 15대 총선 때는 모두 18개의 금배지를 낳으면서 정점을 찍기도 했다.이 밖에 문교부 장관을 역임했던 1대 교육부총리 한완상(36회), 5개의 시중·국책 은행장을 거치고 삼성·대우그룹 회장을 하다 이수그룹을 창업한 김준성(20회), 박사로 통하는 육각수 이론의 창시자인 전무식(31회) 한국과학기술자 총연합회장, 무궁화 위성 발사를 성공시킨 황보한(37회), 쌍용그룹을 창업한 김성곤(15회) 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국내 제1호 전문경영인인 정수창(20회) 전 OB그룹 회장, 배우 강신성일(37회) 등 군·경찰, 재계, 학계, 의료계, 언론계, 종교계, 연예계 등에도 경북고 출신이 포진해 있다.야구 명문고로도 이름을 높여 전국 규모 대회에서 30여 차례 우승했고 국민타자 이승엽(76회) 선수, 2011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사령탑 데뷔를 했던 류중일(64회) LG 트윈스 감독 등을 배출하기도 했다.윤덕홍(46회) 전 교육부총리의 경우 5형제가, 이효상(4회) 전 국회의장은 4부자가 이 학교를 졸업하는 등 3∼4대에 걸쳐 경북고를 나오거나 5∼6부자, 4∼5형제가 모두 경북고에 다닌 사례도 적지 않다.◆장학회(재)경북중고동문장학회는 1991년 8월21일 설립됐다.총동창회는 2016년 개교 117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목표액 100억 원의 장학기금을 모금하고 있다.1년 6개월 만에 목표액 50억 원을 돌파했으며 현재까지 약 60억 원이 모였다. 장학기금 참여 동문도 1천200여 명이 된다.장학회는 매년 1억 원 내외로 재학생 및 모교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지난해 기준 모교 재학생 장학금으로 80명에게 7천680만 원을 지급했다.교사의 사기진작을 위해 우수교사 10명을 선정, 해외 연수를 제공했으며 모교 재학생이 학업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학교 시설지원비로 2천500만 원을 사용했다.특히 ‘경맥장학생’으로 3회 이상 선정된 학생에게는 ‘경맥장학회’에 자동 가입돼 졸업생 선배와 1:1 멘토서비스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주는 등 선후배간 탄탄한 네트워크 구축에도 힘쓰고 있다.◆다양한 연례 행사총동창회는 매년 1월 3번째 화요일에 정기총회 및 신년교례회를 열고 있다.전국에서 400여 명의 동문이 참여해 당해 연도 예산안 승인 등의 안건과 함께 동창회 관련 회의를 진행하고 선후배 간 신년 인사를 나누는 행사다.매년 5월 대규모 체육대회인 ‘경맥제’도 열린다.현재까지 47회 열린 경맥제에는 매년 경북고 운동장에서 개최되며 전국에서 동문 2천여 명이 참여한다.다양한 종목의 경기를 펼치며 가족들도 다 같이 즐길 수 있는 다채로운 콘텐츠를 선보이고 있다. 매년 선후배 2기수가 주관, 경기종목과 상품 등을 구성해 준비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로 오는 9월로 연기됐다.매년 10월에는 재경경맥가을축제와 청가을체육대회가 펼쳐진다.재경동창회가 주최하는 재경경맥가을축제는 서울에서 개최된다. 매년 1천500여 명의 동문과 가족들이 모인다. 각종 경기를 비롯한 초청가수 공연 등을 통해 동문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청가을체육대회는 보통 재경경맥가을축제 이후에 치러지며 59회 이후 기수들이 활동하는 ‘경정회’에서 주관해 경북고 운동장에서 열리고 있다.‘젊은 피’인 경정회가 주관하는 만큼 더욱 활동적이고 의욕적으로 진행되며 상황에 따라서는 체육대회 대신 야유회나 엠티 등으로 대신하기도 한다.이와함께 부산, 포항, 제주 등 각 지역동창회에서도 지역동문들이 모여 소규모로 체육대회 및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졸업 10주년 마다 진행되는 행사는 경맥제 전날 실시하고 있다. 이번 50주년 행사는 9~10월께 1박 2일 코스로 진행될 예정이다.전국에서 40여개의 기수, 250여 명이 참가하는 전국합동산행도 있다. 난이도 별로 정해진 코스를 산행한 후 최종 집결지에 모여 만찬을 나눈 후 행사를 마무리한다.매년 총동창회장배 및 재경동창회장배 골프대회, 당구대회, 바둑대회, 테니스대회 등도 개최된다.이와 함께 경북중·고 , 전고·북중 총동창회 친선 교류전도 열린다.2000년 4월 양교동문의 바둑대회로 시작됐다. 2001년 4월 제3회 대회에서부터 바둑과 골프로 양교 친교를 다지기 시작한 이래 양교 순환방문과 양교 동문간의 친교를 위한 가교 역할에 큰 뜻을 품고 맥을 이어 가고 있다.경맥OB합창단, 경맥 산악회, 경맥 문학회, 수경회 등의 동창 모임도 활발하다.◆천경준 동창회장 인터뷰‘아는 사람(知), 생각하는 사람(思), 행하는 사람(行)’.경북고의 교훈이다.씨젠 회장인 천경준(47회) 총동창회장은 총동창회를 자랑해달라는 말에 “경북중·고 동문들은 교훈을 누구보다도 마음 속 깊이 잘 간직하며 실천하고 있다고 자부한다”고 강조했다.천 회장은 “경북고에서는 경북고인은 무엇을 알 것이며, 무엇을 생각할 것이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항상 깨우치도록 가르쳤다”며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게, 과정은 공정하게,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했는데 경맥인들은 이를 가장 잘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했다.지난 4월20일 회장직을 맡은 천 회장은 가장 먼저 장학사업에 몰두했다.장학기금을 매년 일률적으로 재학생들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다.천 회장은 “현재까지 동문들이 십시일반 모은 총액이 60억 정도 된다. 이를 예금해놓고 이자로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는데 이자율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며 “그렇다보니 매년 장학금도 줄고 있다. 이에 매년 똑같은 장학금 지급을 위해 최근 수익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학동역 사거리에 65평 짜리 상가를 매입, 신세계푸드를 입점시켜 수익사업을 시작한 것.그는 “은행 이자의 3배 정도의 수익이 발생하고 있다”며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고 자극을 받아 우리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고 기여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 학교 장학회에 다시 기부를 하는 선순환 구조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천 회장은 이와함께 회장직을 맡은 이후 장학회에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씨젠의 주식을 기증하기도 했다.여기에는 기분 좋은 에피소드도 있다. 그는 “주식을 기증할때만 해도 팔면 2억 원 정도였지만 파는 과정에서 코로나19로 씨젠의 주식이 오르면서 기증액이 약 5억 원으로 껑충 뛰었다”고 웃어 보였다.씨젠은 코로나19 진단키트를 만드는 회사로 코로나19 진단키트 수요 증가에 따라 주가가 상승한 것.천 회장은 이와함께 멘토링 사업도 추진 중이다.천 회장은 “스마트 폰을 이용해 전 동문이 멘티가 되고 멘토가 되는 사업을 시작한다”며 “학생이나 졸업생, 사회인 등 경북중고 출신 동문이라며 누구가 고민을 나누고 누구나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했다.이어 “동문 중에는 다양한 방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많은만큼 서로에게 힘이 되고 힘을 주는 멘토링 사업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라며 “현재 홈페이지 구축 중에 있으며 이는 경맥인들만의 특별한 혜택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마지막으로 천 회장은 “우수한 인재는 ‘좋은 스승’과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얘기가 있다”며 “경북고에서 다양한 계층에서 훌륭한 인물이 나와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가 될 수 있도록 총동창회가 좋은 스승의 역할을 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역설했다. 기사수정이혜림 기자 lhl@idaegu.com

한눈에 세계여행 하기 (14) 뉴질랜드②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여행은 당분간 먼 나라 이야기가 될 전망이다. 하지만 여름 휴가철이 다가오고 있어 여전히 해외여행에 대한 로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뉴질랜드에는 청정 자연의 아름다운 풍경부터 수준 높은 미식까지 다채로운 관광 명소가 즐비하다. 특히 가족, 연인, 신혼 부부 등과 함께 방문하기 좋은 휴양지가 많다. 뉴질랜드만의 특색 있는 지열 에너지를 활용한 온천과 머드 욕부터 세계적인 와인 산지, 여름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고급 휴양지 등 ‘랜선 여행’을 통해 가볼만한 구석구석 명소를 소개한다. ◆가족 여행 맞춤 코스, ‘로토루아’ 로토루아는 뉴질랜드에서 어린 아이부터 어른들까지 온가족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매력만점의 여행지다. 로토루아는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지열지대 중 한 곳이다. 강력한 지열 에너지로 지친 심신을 달랠 수 있는 머드욕이나 온천욕도 로토루아에서 놓칠 수 없는 즐길 거리다. 자연 그대로의 지열 온천과 부글부글 끓는 머드를 직접 체험할 수 있다.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온천과 스파가 도처에 있어 어디서나 쉽게 여행에 지친 노곤한 몸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낼 수 있다. 로토루아의 ‘테 푸이아(Te Puia)’는 로토루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지열지대다. 신비한 지열 현상과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의 문화를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뜨거운 물줄기가 30m 높이로 치솟는 포후투 간헐천도 볼 수 있다.특히 지열로 다양한 채소와 육류를 익혀 먹는 마오리족 전통 조리법인 ‘항이(Hangi)’ 음식도 맛볼 수 있다. 마오리 미술공예학교가 함께 위치해있어 마오리족 전통문화를 두루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지다. 미술공예학교에서 마오리 공예품의 제작 과정을 구경하고, 마오리족 전통 공연을 직접 배우는 등 뉴질랜드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배워볼 수 있다. 특히 ‘헬스 게이트(Hells Gate)’에서는 대지의 뜨거운 에너지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로토루아 북동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있으며, 7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유황, 머드 온천이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활발한 온천 지역 중 하나다. 부글부글 끓는 물과 머드, 증기가 솟는 분기공과 함께 남반구 최대 규모의 온천 폭포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독특한 지열 현상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레드우즈 트리워크(Redwoods Treewalk)’는 출렁출렁한 흔들다리를 걸어보는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삼나무 숲을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공중의 출렁이는 흔들다리를 통해 탐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생태관광 명소다. 100년이 넘는 유구한 세월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22그루의 삼나무들이 23개의 흔들다리를 통해 총 533m 길이로 이어져 있다.6m 높이부터 최대 12m까지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데 안전 장구나 보호 장비 없이도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또 레드우즈 나이트라이츠의 야간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하면 2.5m 높이에 설치된 30여 개의 독특한 등불이 어두운 숲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아름다운 풍경도 감상할 수 있다. ◆신혼부부와 연인들의 로맨틱한 여행 명소 ‘더니든’ 커플 여행이나 신혼부부의 여행지로 뉴질랜드를 찾는다면, 최근 대세는 ‘더니든(Dunedin)’이다. 더니든은 남섬 오타고 지방에 자리해 있다. 일명 ‘남반구의 에든버러’라고 불릴 만큼 스코틀랜드의 문화와 특색이 짙은 도시다. 빅토리아 양식의 우아한 건축물과 유럽 어느 거리를 꼭 닮은 예스러운 풍경은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화보가 된다. 더니든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연인과 로맨틱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뉴질랜드의 유일한 성인 라나크 성(Larnach Castle)과 고딕 양식의 교회 첨탑, 영화 같은 건축미를 자랑하는 더니든 기차역 등을 둘러보다 보면 빅토리아 시대의 낭만에 한껏 빠져들게 된다. 더니든에는 자연 걸작도 많다. 도심에서 2㎞ 남짓한 거리에 있는 터널 비치(Tunnel beach)가 대표적이다. 바닷물의 끊임없는 침식 작용으로 형성된 높은 벼랑과 해안으로 튀어나온 수없이 많은 곶이 만드는 역동적인 풍경은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을 남긴다. 터널 비치에서는 벼랑을 관통하는 좁고 긴 터널도 있는데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지는 청량한 바다 풍경이 현실을 넘어선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자연이 준 가장 아름다운 선물’로 불리는 오로라(aurora) 관측을 하기에도 좋은 명소다.오로라를 관측하기 가장 좋은 시기는 평균적으로 3~9월이다. 이외에도 한가로운 산책이나 서핑을 즐기고 싶다면 세인트 클레어 비치(St Clair Beach)로 이동해보자. 도심에서 멀지 않아 편리하고 현대적으로 조성된 산책로는 물론 해수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여럿 있어 어디서나 쉽게 접근이 가능하다. ◆와인과 미식의 천국, ‘혹스베이’ 질 좋은 토양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뉴질랜드는 세계적인 와인 산지로 유명하다. 지역과 관계없이 가장 많이 재배되는 샤도네(Chardonay)와 뉴질랜드 와인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소비뇽 블랑(Sauvignon Blanc), 깊고 묵직한 맛이 특징인 피노 누아(Pinot Noir)까지 세계 와인 시장에서 뉴질랜드의 명성은 이미 남다르다. 와인과 근사한 다이닝을 즐기는 미식 투어를 선호한다면 미식가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혹스베이(Hawke’s Bay)가 있다. 혹스베이는 뉴질랜드 와인 여행의 출발점이자 뉴질랜드 내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단지다.1851년 소수의 프랑스 선교사가 토지를 개간해 와이너리를 만들고, 천주교 수사들이 포도나무를 가꾸었던 것이 시초다. 혹스베이의 와인 지대는 김블렛 그레블스(Gimblett Gravels), 트라이앵글(triangle), 테마타(Te Mata) 등 여러 개의 소지역으로 나뉘어 있다.대표 와인으로는 깊고 풍부한 맛의 샤르도네와 적포도주가 있다. 70여 개가 넘는 포도원 중 42곳에서 와인 시음을 제공하며, 대다수의 포도원이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한다. 뉴질랜드 맛집 대부분은 포도주 양조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과 분위기에 맞게 독창적인 음식 메뉴를 개발하기 때문이다. 미식 체험 후 날씨가 화창하다면 자전거로 포도원을 구경하는 투어도 추천한다. ◆여유로운 항구 도시, ‘베이 오브 플렌티’ ‘베이 오브 플렌티(Bay of Plenty)’는 여름의 매력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햇볕의 고장이다. 서퍼들이 사랑하는 해변과 따뜻한 바닷물, 부드러운 백사장, 수준급 실력을 자랑하는 레스토랑까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고급 휴양지의 인프라를 대부분 갖추고 있다. 특히 뉴질랜드 내에서도 알아주는 전망 명소로 통한다. 이곳에는 해발 230m의 휴화산 마우아오(Mauao)가 있다. 마우아오 산 정상에 오르면 광활한 태평양만의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펼쳐진다.탁월한 전망으로 관광객과 지역민 모두에게 사랑받는 산책로로 꼽힌다. 또 현지인 사이에서도 인정받는 로컬 휴양지로 유명하다. 서핑이나 낚시, 조개잡이를 하거나 해수욕을 즐기기에 제격이기 때문이다. 파파모아 해변(Papamoa Beach)에서 지상의 요트라 불리는 삼륜 블로 카트(Blokart)를 타고 짜릿한 속도감을 즐길 수 있다. 또 마웅가누이의 해수 풀장에서 뜨거운 바닷물에 몸을 담그는 여유로운 시간도 누릴 수 있다. -자료 제공: 뉴질랜드 관광청.구아영 기자 ayoungoo@idaegu.com

만성 피로 증후군

피로감을 호소하면 병원을 찾는 이들이 많다.대부분 단기간 피로를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여행이나 운동 혹은 휴식을 취하면 호전된다.하지만 적어도 4개월 혹은 6개월 이상 피로감을 느끼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면 이야기는 달라진다.이 경우에는 근육통과 두통 등의 전신 통증이 있거나, 집중력이 떨어지고 임파선 통증과 인후염 등을 동반하기도 한다.다음 8가지의 증상 중에 4가지 이상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만성피로 증후군으로 진단할 수 있다. 1. 운동이나 고된 일을 한 후 24시간 이상 지속되는 피로감이 있다.2. 수면 후에도 개운하지 않은 상태가 지속된다.3. 최근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집중이 잘 안 된다.4. 근육통이 있다.5. 관절에 염증이 없는데도 아프다.6. 전에 없던 새로운 두통이 생긴다.7. 목 부위에 임파선을 누르면 아프다.8. 목이 자주 붓고 인후염이 생긴다. 만성 피로 증후군의 원인은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나,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요인들이 관여하는 것으로 추측된다.따라서 치료도 통합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 일상생활을 하기 어려울 정도의 심한 피로감을 느끼면서, 근육통과 집중력 저하를 동반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만성 피로는 신경 전달물질의 불균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연구가 많다.집중력과 활력 그리고 행복감은 대부분 신경 전달물질들이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이중 활력과 기민함을 유지시켜주는 물질은 도파민이며, 집중력과 즐거움 혹은 동기부여와 같은 느낌은 노르에피네프린, 그리고 만족감 및 통증은 세로토닌과 관련이 있다.이러한 신경 전달물질의 부족이나 과잉으로 인해 불안과 우울한 느낌이 생긴다.결국 신경전달물질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는 요인들이 만성 피로 증후군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르에피네프린과 도파민을 만드는 물질은 티로신이라는 아미노산인데, 이는 갑상샘 호르몬을 만드는 원료이다.또 트립토판이라는 아미노산에서 세로토닌이 만들어지고, 세로토닌은 멜라토닌으로 전환된다.때문에 결국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불안과 우울증상 뿐만 아니라 불면증도 함께 동반될 수 있다.신경전달물질의 고갈이나 불균형의 주요인은 스트레스이다.스트레스는 정신적인 부분도 있지만 육체적인 부분 특히 체내의 염증이나 지속적인 면역자극에 의한 경우가 많다.스트레스가 있을 때 일시적으로 코티졸이라는 물질이 분비되지만,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코티졸 분비는 저하되고 결국 신경전달물질의 고갈이나 불균형이 초래돼 다양한 증상을 호소한다. 만성 피로 증후군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은 아직 없다.다만 관련된 여러 증상이 있을 때 일시적으로 약물을 사용할 수 있다.알레르기나 비만, 호르몬의 불균형도 만성 피로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요인들을 교정하는 것도 필요하다.만약 신경 전달물질이 고갈됐다면 이들의 원료가 되는 아미노산과 필수 영양물질을 충분히 공급하는 것도 증상개선에 도움이 된다.식사의 패턴 운동여부, 알코올 섭취, 현재 본인이 감당하는 정신적인 스트레스 정도 등을 파악한 후 조절하는 것도 중요하다.복합적인 요인들을 찾아 교정하고 치료하면 대부분 증상이 호전될 수 있다. 도움말=영남대병원 가정의학과 정승필 교수 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

김천 방초정

김천 시내에서 남쪽으로 황악산 바람재를 넘어 공자동 계곡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감천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이 나온다. 마을 입구에 2층 누각으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품은 정자 하나가 길손을 맞는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주심포계 이익공 팔작지붕 양식의 건물로 1974년 12월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이다.1625년(인조3년) 원터마을에서 태어난 유학자 부호군 연안이씨 방초(芳草) 이정복(1575-1637)이 사별한 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알려져 있다. 세월이 흘러 퇴락해진 건물을 1689년 손자 이해가 중건하고, 다시 1727년에 보수했는데 이듬해 이인좌가 일으킨 ‘무신의 난’ 때 파손되고 말았다. 한동안 부서진 채 방치되다가 1737년에 일어난 홍수로 인해 유실된 누정을 1788년 5대 후손인 이의조가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세운 것이 현재 우리가 만나는 ‘방초정’이다.동남향인 ‘방초정’ 앞에는 오랜 세월을 견뎌온 고목을 품은 작은 연못이 하나 있다. 연못가에는 배롱나무를 비롯해 목백일홍, 나리꽃 등이 어우러져 한 여름에 찾아가면 왜 이곳을 ‘방초(芳草)’라고 부르는지 짐작할 수 있다.정자 바로 앞까지 자동차가 들어갈 수도 있지만 상원 마을 입구에서 부터 걸어가면서 보는 연못과 방초정의 풍경이 으뜸이다. 한 시인은 이 주변경치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방초정십경(芳草亭十景)’이란 시문도 남겼다.‘방초정’이 있는 원터 마을은 조선시대의 관영숙소인 ‘상좌원(上佐院)’이 있던 곳인데 마을 이름은 여기서 비롯됐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중기인 1519년(중종3)으로 추정된다. 연안이씨 부사공파 일가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룬 이래 세거지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전형적인 반촌이다.​연안이씨는 신라 태종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정벌할 때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의 부장으로 와서 공을 세운 후 신라에 귀화한 ‘이무’를 시조로 한다. 이무는 본래 중국 노자의 후손으로서 무열왕이 그를 ‘연안후’로 봉하고 식읍을 내린 것이 성씨의 출발이다.◆방초정과 최씨담(崔氏潭)‘방초정’은 2층 누각에 팔각지붕을 얹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장방형 건물이다. 2층 누각인 점은 일반적인 누정의 형태이나 2층의 방이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양 끝에 방이 배치되는 누정의 일반적인 구조와는 달리 방에 앉아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는 게 ‘방초정’의 특징이다.누정 가운데 자리한 방의 둘레는 벽이 아니라 세 짝의 들문으로 이뤄져 있어 들문을 위로 들어 올려 걸어두면 사방으로 트인 공간을 이룬다. 이는 ‘방초정’이 자리한 곳이 평지라 마을 곳곳을 내려다 보는 것은 물론 마을을 오가는 사람들과 주변 논밭의 사정을 살필 수 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 한 쪽 방향으로만 보는 구조가 아니라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앉아 소통하기에 유리한 구조를 가진다. 들문을 내려서 닫더라도 문 한가운데 나있는 작은 살창 쌍여닫이문이 밖과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정자의 아래층은 자연미를 살린 통나무 기둥에 2층 온돌방에 불을 지피는 아궁이와 굴뚝 기능을 하는 호박돌을 붙인 벽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기단 네 모서리 지붕 추녀에는 둥근 활주(闊柱)가 서 있어 건축적으로도 매우 아름답다.‘방초정’ 앞에는 ‘최씨담’이라 불리는 정방형의 연못이 있다. 두 개의 섬을 가진 연못은 이른바 ‘방지원도’로 이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인공정원의 일반적인 형태다.연못가에는 수백 년은 됨직한 버드나무가 물가에 깊게 드리워 있고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화사한 붉은빛이 연못에 비쳐 장관을 이룬다. 주변에는 오랜 세월 연못과 정자 곁을 지켜온 회화나무와 불두화, 사철나무, 작약, 원추리, 국화, 창포 등이 연못에 떠있는 개구리밥과 어우러져 정취를 더 한다.이정복이 세운 ‘방초정’과 인공연못인 ‘최씨담’에는 조선의 쓰라린 역사와 연안이씨 집안의 슬픈 가족사가 담겨 있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구로다가 이끄는 제3번대와 모리와 시마즈가 인솔하는 제4번대가 성주, 지례, 개령, 김산을 지나 추풍령으로 향했다.​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 인근 ‘하로마을’의 화순최씨에게 장가를 들었던 이정복은 처가에서 혼자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전쟁이 터지자 선영이 있는 능지산 아래로 피신했다. 친정인 ‘하로마을’에 남아 있던 부인 최 씨는 왜군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죽어도 시집에서 죽겠다며 여종 석이를 데리고 시댁으로 향했다.​산길 40여 리를 걸어 원터마을에 도착했으나 이미 시댁식구들은 모두 피난을 가고 난 뒤 였다. 시댁식구들이 있는 능지산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왜구들과 마주치게 된 최 씨는 왜구에게 겁탈을 당하느니 깨끗하게 죽겠다며 웅덩이에 몸을 던진다. 최씨가 따르던 여종 석이에게 옷을 벗어 부모님께 전해주길 당부하고 자신은 명의로 갈아입고 투신하자 석이도 따라 뛰어들어 죽었다고 한다. 최씨의 나이 열 일곱이었을 때다. 후에 사람들은 이 웅덩이를 ‘최씨담(崔氏潭)’이라 부르고, 이정복은 부인이 자결한 웅덩이를 넓혀 연못을 만들고 그 옆에 자신의 호를 딴 ‘방초정’을 세웠다.​ 이러한 사연을 알고 난간에 오르면 연못의 두 섬은 이정복 부부처럼 안타까워 보이기도 하고, 최씨와 석이처럼 의연해 보이기도 한다.‘방초정’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최씨 부인이 물에 빠져 죽고 난 후 신랑 이정복은 벼슬 임지에서 돌아와 부인을 잊지 못해 여러 해 동안 웅덩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는 후손을 봐야 한다는 문중의 권유로 훗날 재혼을 하게 되지만 못 옆에 정자를 지어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부부의 인연을 영원토록 함께 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그렇게 먼저 간 부인을 그리워하면서 지은 정자가 ‘방초정’이며, 웅덩이를 넓게 파서 만든 연못을 ‘최씨담(崔氏潭)’이라고 이름 지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방초정의 ‘방초’는 당나라 시인 최호(704~705)의 시 ‘등황학루’에서 따왔다. ‘앵무 섬에는 꽃다운 풀들만 가득하구나’(芳草萋萋鸚鵡洲)라는 싯구다. 황학루는 악양루, 등왕각과 더불어 중국 강남 3대 누각의 하나다. ‘방초’는 또 ‘춘향전’에서 이몽룡이 광한루 봄 풍경을 읊는 대목에도 나온다. ‘나뭇잎이 푸르게 우거진 그늘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綠陰芳草勝花時)’라는 대목에서다.그러나 이정복에게 ‘방초’는 다른 의미였을 것이다. 부인이 자결할 때가 ‘녹음방초승화시’였던 5월말이나 6월초로 추정된다. 꽃잎 다 떨군 나무들이 새 잎을 달고 싱그러운 기운을 한껏 내 뿜을 때 이정복은 억장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했던 것이다. 그에게 ‘방초’는 절개를 지킨 부인의 향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백과 최호가 ‘황학루’에서 앵무 섬을 내려다보며 예형의 죽음을 애도했듯이 이정복도 ‘방초정’에서 ‘최씨담’을 보며 부인의 죽음을 슬퍼했을 것이다.◆화순최씨 정려각과 여종 석이의 비석​마을 밖에서 ‘방초정’에 오르려면 정려각을 지나야한다. ‘방초정’ 들머리에 세워진 정려각에는 ‘절부 부호군 이정복 처증 숙부인 화순최씨지려(節婦 副護軍 李廷馥 妻贈 淑夫人 和順崔氏之閭)’라고 쓴 비각과, ‘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婢)’라고 쓰인 작은 비석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정복의 부인에게 인조임금이 1632년(인조 10년)에 내린 어필 정려각이다.‘충노석이지비(忠奴石伊之碑)’는 최씨 부인과 함께 자결한 몸종 석이의 비석이다. 이 비석은 연안이씨 후손들이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제작했으나 종의 비석을 절부의 정려각 앞에 세울 수 없다며 ‘최씨담’에 던져졌다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 발견돼 현재의 자리에 옮겨 놓았다.경북 유형문화재 제46호로 지정된 ‘방초정’에는 많은 시인과 묵객들이 누에 올라 주위의 경치를 찬미한 시와 글씨를 남겼다. 김천 삼산금오산, 황악산, 대덕산의 중앙을 관통해 흐르는 감천 중류에 위치한 ‘방초정’에는 편액뿐 아니라 20개가 넘는 시판이 걸려있다. 그만큼 ‘방초정’에서 조망되는 경치가 뛰어나다는 뜻이다.많은 시인 묵객들이 ‘방초정’에 올랐을 때 끓어오르는 시상을 시로 표현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 가운데 작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방초정십경’이 유명한데, 방초정에는 십경의 제목이 각각 따로 판각돼 기둥과 대들보에 걸려있다. 그 가운데 일경 ‘일대감호(一帶鑑湖)’는 방초정에서 바라다 보이는 경치를 시로 표현했다.檻外鑑湖一帶流 (난간 밖에 감호가 한 줄 흐르니)明沙白石短長洲 (맑은 모래 흰 돌이 들쑥날쑥한 물가에 있구나)桃花氣暖春風靜 (복사꽃 기운이 따뜻한 가운데 봄바람이 고요하니)時有漁郞係片舟 (때때로 고기잡는 사내가 조각배를 매는구나)이 시에서 드러나는 정취는 아쉽게도 현재의 ‘방초정’에 올라서는 느낄 수 없다. 이 시가 말하는 ‘감호’는 ‘감천’으로 현재의 방초정에서 200m 이상 떨어져 있고 둑 아래여서 보이지 않는다. ‘방초정십경’이 지어진 시기가 난간 아래 감천이 흐르는 곳에 방초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이정복 부부의 애절한 사연을 간직한 채 오랜 세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킨 ‘방초정’은 지난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도 지정됐다.서충환 기자 seo@idaegu.com

삼국유사 기행 (68) 백률사

삼국유사 전체 총론적인 성격을 가진 기이편에서 신라의 흥망성쇠를 더듬어 보고, 각론이자 본론이라 설명하는 흥법편에서 불교의 전래에 대한 이야기를 둘러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본격적인 불교사를 통해 전해지는 불국토 구현이라고 할 수 있는 탑상편을 소개한다.탑상편은 황룡사, 영묘사, 흥륜사, 백률사, 천룡사, 무장사, 민장사, 생의사 등의 유명 사찰과 종, 탑 등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간다.삼국유사 탑상편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가섭불연좌석에 이어 황룡사 장육, 황룡사 9층탑, 황룡사종과 분황사종, 흥륜사 금당십성 등의 내용이 나타나지만 기행 순서에 따라 백률사편을 먼저 소개한다.◆삼국유사: 백률사계림의 북쪽 산은 금강령이라 하고, 산의 남쪽에 백률사가 있다. 절에 대비상이 서 있는데 언제 처음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지 못하나 신령스런 이적이 자못 많았다. 어떤 이는 중국의 뛰어난 기술자가 중생사의 불상을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고 한다.백률사 앞의 바위에 찍혀있는 발자국을 두고 사람들은 “이것은 대성이 일찍이 하늘의 도리천에서 돌아와 법당으로 들어갈 때 돌 위를 걸어간 발자국이다. 이제까지 문드러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부례랑을 구출해 돌아올 때 나타난 자취”라고도 말한다.천수 3년은 임진년(692)인데 9월7일에 효소왕이 대현 살찬의 아들 부례랑을 국선으로 삼았다. 1천여 명의 무리가 따랐는데 안상과 특히 가까이 지냈다. 천수 4년 계사년 늦봄에 무리를 이끌고 금란에 놀러 가다 북명 경계에 이르렀는데 말갈족에게 잡혀가니 무리가 모두 하릴없이 돌아왔으나 안상만 뒤쫓아갔다. 이때가 3월11일이다.왕이 이를 듣고 놀라 “아버님께서 신령스런 피리를 받아 내게 전해 주셨다. 지금 현묘한 가야금과 함께 궁궐 안 창고에 간직되어 있는데 어떤 이유로 국선이 적에게 포로가 되었단 말이냐, 이럴 어떻게 할꼬”라고 말했다.그때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를 뒤덮었다. 왕이 또 깜짝 놀라 창고 안을 살펴보라 했더니 가야금과 피리 두 보배가 없어졌다. “내 어찌 이다지 챙기지 못하여 국선을 잃더니 또 가야금과 피리를 잃어버렸단 말이냐”며 한탄했다.이에 창고지기 김정고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 4월에 전국적으로 “가야금과 피리를 찾는 자에게 상으로 1년치 세금을 주겠다”고 방을 붙였다.5월15일, 낭의 두 부모가 백률사의 대비상 앞에 가서 정성들여 여러 날을 기도했다. 그러자 홀연히 상 위에 가야금과 피리가 나타나고, 낭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걸어 나왔다. 두 부모가 엎어질 듯이 기뻐하며 오게 된 경로를 물었다.“제가 잡혀가 적국에서 목장 일을 하는데 갑작스레 단정한 스님이 손에 가야금과 피리를 들고 나타나 나를 따라오느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닷가에 이르렀는데 안상을 만났습니다. 거기서 이 피리가 둘로 나눠져 두 사람이 각각 하나씩을 타고, 스님은 가야금을 타고 바다에 둥둥 떠서 돌아오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에 이르렀습니다”고 했다.이런 경위를 들은 왕은 크게 놀라며 낭을 맞아들이고, 가야금과 피리를 안으로 들였다. 금과 은으로 만든 각각 무게가 50냥 되는 다섯 가지 그릇 두 벌, 마납가사 다섯 벌, 굵은 명주 3천 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바쳐 부처님 은혜에 보답했다.나라 안에 대사면을 실시하고, 관련된 사람에게 직위를 3급씩 높여주고, 백성들에게 세금 1년치를 면제해 주었다. 절의 주지승은 봉성사로 옮기고, 낭은 대각간에 임명했다. 아버지 대현 아찬은 태대각간으로 삼고, 어머니 용보부인은 사량부 경정궁주로 삼았다. 안상 스님은 대통으로 삼고, 창고지기 다섯 사람은 풀어주면서 각각 5급의 벼슬을 내려주었다.6월12일 혜성이 나타나 동쪽 방면이 어두워지고, 17일에는 또 서쪽 방면이 어두워졌다. 일관이 “가야금과 피리에게 벼슬을 내리지 않아서 그렇습니다”고 아뢰었다.이에 신령스런 피리를 일컬어 ‘만만파파식적’이라 했다. 그러자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 영험스런 이적이 많으나 글이 길어져 싣지 않는다.◆새로 쓰는 삼국유사: 화랑과 고구려 출신 장군의 충돌효소왕 때 화랑의 국선이 되었던 부례랑은 왕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었다. 부례랑은 국선이 된 이후 1천여 명의 낭도들을 이끌고 전국을 유람하며 낭도들의 신체를 단련하는 한편 전술훈련 등으로 호연지기를 키웠다.부례랑 일행은 강원도 강릉을 지나 설악산에 이르러 산수를 즐기며 전술훈련을 하기로 했다. 설악은 산세가 아름다우며 계곡이 깊어 전쟁에 대한 훈련을 하기에 좋은 지역이었다.그러나 당시 설악산 일대에는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가 대규모 목장을 경영하며 1만여 명의 가족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설악산 일원에서는 신라의 조정보다 대막호리의 영향력이 더 크게 미치고 있었다.대막호리는 장군의 후손답게 덩치가 우람하면서 무예에 뛰어날 뿐 아니라 덕이 있어 주민들이 모두 잘 따랐다. 그는 일대 목장과 농업, 임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대부분 자신의 휘하에 두고, 2천여 명의 청년을 군사훈련 시키며 사병으로 키워 외부침입에 대한 방어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 부례랑 일당이 전술훈련을 하면서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이 대막호리 영역의 가축들을 놀라게 하는 한편 일부에서 농작물을 훼손하기도 하고, 부녀자들을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대막호리는 낭도들의 거침없는 행동에 크게 분노해 국선 부례랑과 안산 등의 우두머리 20여 명을 체포해 가두어버렸다.당황한 부례랑이 “우리는 신라의 화랑도들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지역을 익히고 전술훈련을 하고 있는 중이다”며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했으나 대막호리는 오히려 콧방귀를 뀌며 풀어주지 않았다.대막호리는 “너희들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준 것이 무엇이냐, 우리가 말을 키우고 옥수수를 재배해 세금을 바친 것으로 배부르게 먹고살면서 고마움은 모르고 오히려 핍박하다니 가당찮다”고 꾸짖으며 화를 냈다.부례랑은 대막호리의 단호함에 전령을 불러 궁중으로 급파발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고구려 장군의 후손 대막호리를 설득할 수 있는 군사나 강력한 힘을 가진 장수가 필요하다”고 짧게 사연을 적었다.효소왕은 국선 부례랑이 국내에서 볼모로 잡혔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통일 이후 신라 국민들에게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할 군사가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삼국을 통일하고, 신문왕에 이어 효소왕 대까지는 당나라와도 평화적인 분위기에서 교류하며 감히 신라를 넘보는 나라는 없었기 때문에 국선을 포로로 잡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그때 백률사의 주지 스님은 고구려 출신 혜통 국사의 배움을 이어받은 정혜스님이었다. 정혜스님은 국내는 물론 국제 정세에 밝을 뿐 아니라 특히 고구려 신민들의 세계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백률사는 흥륜사와 황룡사, 분황사에 이은 국가적인 사찰로 왕실에서도 잦은 법회를 주관하는 신라의 주요사찰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었다. 효소왕 또한 백률사 주지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터라 부례랑의 소식을 접하고 바로 정혜스님을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왕의 밀지를 받아든 정혜스님은 무승 셋을 대동해 빠르게 설악산으로 이동했다. 화랑들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칫 갈등관계가 깊어질 뻔했던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정혜스님의 주선으로 깨끗하게 오해를 풀고 친하게 되었다.“신라에는 더 이상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두가 백성들을 위한 정치이고, 튼튼하고 건강한 나라를 위한 훈련 과정에서 빚어진 착오는 서로가 이해해야 합니다”는 스님의 말에 부례랑과 대막호리는 경계를 풀고 호탕한 건배를 나누며 뜨거운 관계로 발전해 나라를 위하는 일에 마음을 모으기로 다짐했다. *새로 쓰는 삼국유사는 문화콘텐츠 개발을 위해 픽션으로 재구성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강시일 기자 kangsy@idaegu.com

대구·경북 고교총동창회 (24) 상주고

상주고등학교는 66년 역사를 지닌 지역 인재 배출의 요람이다.지금까지 학교를 졸업한 동문만 2만여 명에 달한다. 동문들은 사회로 진출해 상주고의 이름을 알리고 있다.강석진(4회) CEO컨설팅그룹 회장과 대통령 비서실장 및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류우익(13회) 동문, 국군 기무사령부 사령관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종태(14회) 동문, 대한치과협회 선거관리위원장을 지낸 조호구(15회) 동문, 기업은행장과 YTN 대표이사를 역임한 조준희(19회) 동문, 김상배(30회)·김상일(36회) 형제 부장 판사 등이 상주고의 동문이다.◆상주고 역사상주고는 1954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개교했다. 학교는 향토 인재 양성을 바라던 박인양 초대 이사장과 지역 유지들의 염원이 그대로 담긴 장소였다. 그 해 4월 흥암서원 상주고등학원에 소속된 2~3학년을 상주고로 편입시켜 첫 문을 열었다. 이후 2만여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며 지역 명문고로 자리 매김했다.1955년 7월 상주고는 현재 위치(상주시 상산로 117)로 자리를 옮겼다. 남산 구월봉 아랫자락에 있는 학교 터는 예로부터 명당으로 손꼽히던 장소였다. 여기에 조선시대 경상우도를 대표하는 교육기관 상주향교를 계승한다는 의미도 담았다.상주고가 획기적인 발전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국내 최고의 제약회사인 동아제약 창업주인 강중희 회장이 1964년 9월 상주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다.강 이사장은 개교 이념을 육영, 향토개발, 인재양성으로 정하고 교직수당을 신설해 우수한 교원을 초빙하는 등 교직원을 진심으로 아끼는 것은 물론 학교 부지 확장, 건물 신축 등 학교 환경도 일신했다.이후 1977년 7월 현 강신호 이사장(동아쏘시오홀딩스 명예회장)이 취임하면서 학교는 더욱 많은 투자와 발전을 이루고 있다. ‘옳게 배우고 참되게 살자’라는 교훈을 바탕으로 대학입학시험에서 괄목한 성과를 지속적으로 이루고 있다.학교에 대한 투자는 1977년 7월 강신호 현 이사장이 취임한 뒤에도 꾸준히 이뤄졌다.상주고는 넓은 부지와 두 개 동의 교사를 비롯해 기숙사, 도서관, 체육관, 급식소, 중강당, 인조잔디운동장 등을 갖추고 있다. 이런 교육환경을 가진 고등학교는 경북 전체를 뒤져봐도 좀처럼 보기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교정의 소나무숲은 2002년 11월 산림청·생명의숲가꾸기국민운동·유한킴벌리가 주관한 ‘제3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에 뽑힐 정도로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창의성, 인성, 전문성 지닌 지역인재 양성학령인구 감소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상주고는 지역 명문고의 자리를 지켜왔다. 특히 개인별 맞춤식 진로교육에 초점을 맞춘 교육과정은 대학 입시 성과로 나타났다.최근 6년간의 대학수학능력 시험에서 상주고는 경북 전체 계열별 1, 2, 3위를 차지했다.2020학년도 대입에서는 서울대 2명, 연세대 4명, 고려대 1명, 의과대학(연세대 등) 9명, 과학기술원(KAIST 등) 5명, 교육대학(대구교대 등) 4명, 수도권대(서울대 2명 등) 39명, 지방 국립대학(경북대 8명 등) 90명이 합격하는 성과를 올렸다.서울대 일반학과보다 사실상 합격 점수가 더 높은 의학계열 진학 학생이 늘어난 점을 주목할 만하다. 올해 대학 입시에서는 의과대학에 진학한 학생은 9명, 2012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18명이 의대와 치의대, 한의대에 입학했다.2019년엔 경북교육청으로부터 인성교육 중점학교와 소프트웨어 선도학교, 과학 중점학교로 지정돼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체육대회 등 통해 선후배 간 우의 다져상주고 총동창회는 매년 개교기념일인 4월20일 전후로 본교 교정 등에서 총동창회 총회와 체육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무기한 연기했다.총동창회 체육대회는 전국에서 매년 500~1천여 명의 많은 동문이 참석해 성황을 이룬다. 이 모임을 통해 동문들은 동기, 선·후배 간의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이는 모교에 대한 사랑과 동문 간 화합·소통의 장을 만들고 있다.상주고 총동창회 산하에는 각종 모임이 결성, 운영 중이다. 그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모임으로 상주고 총동문골프회를 꼽을 수 있다. 이태구(24회) 회장을 필두로 재경(서울)·재구(구미)·재부(부산) 300명 이상의 동문이 활동하고 있다.매년 상주고 총동창회장 배 및 SBS 고교동창골프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올해도 키움증권배 SBS 고교동창 골프최강전에 한상준(30회), 김진수(35회), 박재철(36회) 동문이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또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동문들도 100명 이상의 응원단을 꾸려 열광적인 분위기로 동문 대표를 응원하는 등 끈끈한 학교애를 자랑하고 있다.◆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은 선·후배 구분없다상주고를 졸업하거나 재학 중인 사람들은 상주시민들로부터 “공부 잘하나 보네”라는 말을 한 번 이상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지역에서 가장 우수하며 가장 많은 졸업생을 배출한 동문들은 지역의 크고 작은 일은 도맡아 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이렇듯 상주시민들의 성원과 교육열로 상주고 동문이면 누구나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이러한 마음은 선배들의 후배들을 위한 기부로 매년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올해 코로나19로 인한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나자 바이오파마 최창욱 회장(23회)이 후배들과 교직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 덴탈 마스크 1만 개를 기부하며 학교를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주었다. 또 용마로지스 금중식 대표이사(26회)는 학교발전기금과 KF94 마스크 1천 개를 기부하는 등 기회가 될 때마다 모교와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동문장학금으로 정암장학회(4회 강구한), 미래꿈장학회(4회 강석진), 삼백장학회(10회 신종운), 상주고장학문화재단(이사장 민광옥 18회), 호원장학회(19회 조호구), 대경장학회(20회 김철대), 이온이엔지장학회(27회 윤칠용), 백화점약국장학회(34회 김상배), 서울내과장학회(39회 여범곤)와 졸업기수별 장학회(21회, 30회, 32회, 33회, 34회, 35회, 38회, 39회)를 비롯한 많은 동문 장학회에서 후배들에게 장학금을 기부하고 있다.한편 2019년 상주고 장학금 규모는 2억여 원으로 경북도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대부분의 장학금은 학교법인 장학금인 수석문화재단과 동천수장학회 등과 동문 장학금이다.◆모교와 동문 잇는 가교이런 성과의 바탕에는 총동창회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 각계각층으로 선배들이 후배들을 응원하고 지켜보고 있다.상주고 총동창회는 1959년 8월 창립됐다. 초대 회장은 김길용 동문이 맡았다. 그 후로 15명의 동문이 동창회를 이끌었다.2대는 박준영(3회), 3대 장수영(2회), 4대 김옥출(1회), 5대 박성락(2회), 6대 강구한(4회), 7대 강석진(4회), 8대 유상근(5회), 9대 김광수(13회), 10대 조호구(15회), 11대 남상도(17회), 12대 민광옥(18회), 13대 장상수(19회), 14대 김철대(20회), 15대 박두석(21회), 현 16대 회장은 김영준(23회) 동문이다.그동안 총동창회는 모교와 동문, 모교와 지역사회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해 왔다. 장학금 기부 등을 통해 후배 사랑을 실천하고 뜻깊은 행사를 통해 동문들을 하나로 묶었다. 또 다양한 봉사활동을 통해 지역사회 발전에 공헌하기도 했다.상주고 총동창회는 매년 개교기념일인 4월20일을 전후로 모교에서 총회를 겸한 체육대회를 연다. 많게는 1천여 명의 이르는 동문이 이날 학교를 찾는다.총동창회 산하에 각종 모임도 활발하다. 특히 총동문골프회는 재경·재구·재부 등 300명 이상의 동문이 참가할 정도로 관심이 높다. ◆김영준 상주고 총동창회장 인터뷰상주고 총동창회 제16대 김영준 회장(23회)은 “최근 몇 년간 상주고가 거둔 대입 성적은 교육 일선에서 힘써주는 교직원과 총동창회, 학교법인, 후배 등 교육공동체 구성원 전원이 만들어낸 성과”라며 “학교의 발전과 모교 후배들을 위해 총동창회가 정신적·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말했다.상주고가 지역사회 교육기관으로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만큼 총동창회도 그에 걸맞은 지원을 해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그러기 위해선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한 동문을 하나로 묶는 총동창회 본연의 역할이 중요하다. 총동창 회장으로 취임한 뒤 그가 동창회 명부를 발간하는 사업에 집중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김 회장은 동문들의 소통과 교류를 위해 졸업생의 거주지역과 직업, 기수를 파악해 1만 명 이상의 동문 소식이 담긴 동창회 명부를 최근 펴냈다.그는 “동문들의 소식을 하나하나 파악하고 이를 기록하기 쉽지만은 않았다”면서도 “먼저 만들어진 동창회 명부를 통해 동문 간 교류와 소통을 확대하고 빠른 시일 내에 동창회 명부를 추가로 완성하는 것이 남은 숙제”라고 말했다. 그는 상주고의 역사와 전통을 기리기 위해 총동창회관 건립도 계획하고 있다.김 회장은 “점점 학교의 신입생 유치가 어려워지고 있다”며 “상주뿐 아니라 전국 중소 도시에서든 똑같은 상황이지만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말했다.그러면서 “중소도시 학교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를 유치해 학교의 전통과 발전을 이어가는 것은 물론 어려운 여건의 학생을 위한 지원도 함께 늘려가야 한다”며 “학교를 졸업한 동문들이 더 소통하고 뭉쳐 다 같이 모교 발전에 힘을 보태게 하는 일이 총동창회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그는 동문들의 교류를 강화할 수 있는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김 회장은 “크고 작은 행사를 통해 모교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모교 장학기금을 확대해 총동창회가 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최근 총동창회는 사무실을 상주고 앞으로 옮겼다. 학교 가까이에서 학교를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학교 발전을 위해 총동창회의 힘을 보태기 위해서다.김 회장은 “뿌리가 튼튼한 나무가 오래가고 멋있는 법”이라며 “항상 모교를 생각하고 명문 사학으로의 발돋움 하기 위해 2만 동문이 다 같이 함께 노력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김일기 기자 kimik@idaegu.com

통풍…바로 알고 치료하자

통풍은 체내에 과다하게 축적된 요산이 결정화되면서 관절과 관절 주변 조직에 반복적으로 염증을 일으키는 만성질환이다.고혈압과 당뇨처럼 만성적인 질환이며 약물로 치료하고 관리하는 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우리나라의 통풍 유병률은 점차 증가하는 추세이다.2008년에는 전체 인구의 0.4%였는데 2015년에는 0.8%로 증가했다. ◆원인과 주요증상통풍의 주된 원인은 요산의 증가 (고요산혈증)이다.요산은 우리 몸 안에서 일어나는 퓨린 대사의 최종 산물이다.대부분의 포유류는 요산분해효소를 가지고 있어서 요산이 분해돼 배설이 되지만,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는 요산분해효소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혈중 요산이 증가한다.고요산혈증은 △요산이 과다하게 생성되거나 △요산이 제대로 배설되지 않을 때 생긴다.대표적인 원인으로 퓨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을 먹으면 요산이 증가하고 요산은 대부분 신장(콩팥)으로 배설되는데 신장 기능이 저하되면 요산이 늘어난다.퓨린이 많이 함유된 음식은 맥주, 육류 (특히 육류의 내장), 조개, 새우, 등푸른 생선 (고등어, 정어리 등), 과당이 많이 포함된 음료 (예. 탄산음료) 등이 있다.통풍의 증상은 관절과 관절 주변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열감 및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것이다.주로 엄지발가락, 발등, 발목, 무릎과 같은 하지의 관절에 생기지만 드물게 손목, 손가락, 팔꿈치에도 나타난다.통풍은 급성 통풍 발작 시기와 통풍간헐기로 구분할 수 있다.급성 통풍 발작은 위에서 설명한 관절이 붓고 아픈 증상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간헐기 통풍은 통풍 발작이 지난 후 통증이 없는 상태다.통풍 발작이 사라졌다고 통풍이 없어진 것은 아니므로 꾸준한 약물 치료를 해야 한다.통풍의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을 경우 통풍결절(요산덩어리)이 관절 주위에 계속 남아있게 되고, 이는 급성 통풍 발작이 반복되는 원인이 되며 관절의 손상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진단과 치료진단은 임상 증상을 바탕으로 피 검사, 관절액 검사, 이중 에너지 CT 등을 통해서 할 수 있다.관절이 붓고 아픈 증상이 있으면서 피 검사에서 혈중 요산 수치가 올라가있는 경우에는 통풍의 가능성이 크다.간혹 급성 통풍 발작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요산 수치가 평소보다 감소하는 경우도 있다.부어 있는 관절에서 관절액을 뽑아서 편광현미경으로 보면 요산결정이 보이기도 하고, 이중 에너지 CT에서 요산결정이 관절 주위에 침착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소견들이 나타나면 통풍으로 확진을 할 수 있다.또 감염성 관절염, 류마티스관절염, 재발성류마티즘, 가성통풍 등과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어서, 다른 질환의 가능성은 없는지도 항상 염두에 두고 검사해야한다. 통풍의 치료는 크게 △급성 통풍 발작의 치료 △요산저하치료 (근본적인 치료)로 나눈다.급성 통풍 발작은 비스테로이드소염제, 콜히친, 스테로이드와 같은 약을 먹어서 조절한다.통풍 발작이 있을 때 단기간 복용하고, 통풍 발작이 지나가면 중단한다.요산저하치료는 통풍으로 진단된 환자들 중에서 반복되는 급성통풍발작이 있거나, 만성신부전 (신장기능 저하), 관절에 요산결정체가 쌓인 경우 등에게서 시작한다.꾸준히 요산저하제를 복용하면 몸속의 요산을 낮추고 관절 주위에 요산이 쌓이는 것을 치료하고 예방하게 된다.몸속의 요산 수치는 적정 범위를 유지하는 것이 좋으므로, 요산저하제를 복용하면서 요산 수치가 3~6 ㎎/㎗ 사이를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생활 속 예방통풍은 약물 치료와 함께 비약물치료(식이요법과 생활습관 개선)를 병행하는 것이 좋다. 영양소가 골고루 포함된 식단으로 구성하되 퓨린 함량이 많은 식품들 (특히 고기의 내장류와 과당이 함유된 탄산음료 등)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그리고 과음과 잦은 음주도 피해야 한다.또 충분한 수분 섭취를 하고 적절한 유산소운동을 할 것을 권한다.간혹 고기나 생선을 아예 먹지 않는다는 환자들이 있는데 이때는 필요한 영양소의 섭취를 위해서 반찬으로 적정량을 드시는 것은 문제가 없다.그리고 맥주만 안 먹고 소주와 막걸리와 같은 다른 술들은 괜찮다고 생각하시는 사람이 있는데 대부분의 술이 통풍에는 좋지 않으므로 가급적 술은 중단하시는 것을 권한다. ◆오해와 진실Q=통풍은 아플 때만 치료하면 된다?A=아니다.급성 통풍 발작의 치료는 아플 때만 하는 것이 맞다.하지만 통풍 발작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통풍 발작이 반복한다.따라서 꾸준한 요산저하제 복용으로 몸속의 요산을 낮추고 관절 주변에 쌓인 요산결정을 없애야 한다.만성신부전과 같이 신장 기능이 저하된 통풍 환자들도 요산저하치료를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Q=통풍의 증상은 관절이 붓고 아픈 것으로만 나타난다?A=아니다.통풍은 만성신부전, 요로결석, 고혈압, 고지혈증, 비만, 당뇨병, 혈관질환 (동맥경화, 심근경색, 뇌졸중)과도 관련이 있다.통풍이 조절되지 않으면 위의 질환들의 위험도 높아진다.따라서 통풍이 있다면 전문가와 상의하여 잘 치료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도움말=대구가톨릭대병원 류마티스내과 김지원 교수이동률 기자 leedr@idaegu.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