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실한 사랑

정명희의사수필가협회 홍보이사비가 내린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났을까? 끝없이 쏟아 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제발 이제 그만 내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창가에 서서 장대비를 바라보다가 커다란 우산을 챙겨 문을 나섰다. 마당에는 빗물이 시냇물처럼 모여서 흘러가고 있다. 도로가를 장식하고 있는 커다란 화분에는 노란 꽃들이 비를 맞으며 흔들리고 있다. 지금 한창 피어난 밀레니엄 벨, 눅눅해진 날씨에도 생긋생긋 고개를 흔들며 인사 짓을 하고 있다. 해를 좋아하는 식물이라 직사광선이 비치는 곳에 심어두었을 터이지만, 한여름 장마가 지루하게 이어지니 저 꽃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으리라. 꽃이 물에 닿아 쉬이 녹아내리지나 않을까 싶어 애처롭다. 밀레니엄 벨의 꽃말은 ‘절실한 사랑‘이라고 하지 않은가. 정말이지 어서 빨리 장마가 그쳐서 해가 반짝 나오기를 밀레니엄 벨 꽃을 보면서 나도 절실하게 바란다.어느덧 팔월 초가 지나간다. 예년 같으면 휴가가 한창일 터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코로나바이러스도 걱정되고 엄청난 홍수가 몰고 온 피해가 너무 커서 휴가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다 보니 이곳저곳 여행하기보다는 그냥 가만히 집에 머무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기분을 잘 챙겨야 할 것 같다. 어느 순간이라도 우울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지 않도록 신경 쓸 수 있도록 바쁘게, 무엇에든 몰두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답인 것 같다. 그렇게 정신을 쏟다 보면 시간도 후딱 지나가고 웬만한 더위는 느낄 겨를도 없이 이겨낼 수 있지 않겠는가.우연히 본 프로그램이었는데 참 신선했다. 신박한 정리라는 프로였다. 이름하여 집구석 카운슬링, 집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는 모토였다. 정리의 달인 미니멀한 삶의 표본이라는 여배우와 맥시멀 리스트의 대표를 내놓으라면 서러워할 개그우먼이 듬직한 남자 출연진과 함께 집을 정리하는 것이다. 그들은 비운 만큼 더해지는 행복을 추구하며 딱 필요한 것만 남기고 정리한다. 어수선하고 뒤죽박죽이었던 의뢰인의 집이 그들의 손길로 착착 정리되어 깔끔하고 아늑한 집으로 탄생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을 정도였으니 정말 잘 정리 정돈된 집에서는 마음 치유가 절로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요즘처럼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났을 때 무엇엔가 몰두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는 정말이지 집 정리만큼 좋은 아이템도 없는 듯하다. 집안 정리를 통해 물건에 얽힌 추억도 돌아보고 정리할 것들은 비워내면서 인생의 소중한 가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 또한 보람 있지 않으랴. 비운 만큼 생기는 여유에 또 소소한 행복으로 채울 수 있다는 신박한 정리, 구석구석 살피다 보면 잊혀있던 것들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며칠 지나 따라서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그동안 묵혀두었던 서랍장부터 열었다. 붙박이로 있어서 좀체 손이 가지 않았던 서랍, 중요 서류를 넣어뒀지만 열어 볼 일이 없었다. 친정아버지 살아계시는 동안에는 등기나 각종 서류 정리를 도맡아 해주셨기에 한 번도 내 손으로 그것을 챙기지 않았다. 서랍을 여니 잊고 있던 물건들이 수십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나하나 들추다가 추억에 잠겨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입주 때 샀던 채권 뭉치가 들어 있었다. 몇 백이나 되는 금액의 채권이 아직도 있었다. 갑자기 공돈이 생기다니, 기뻤다. 그러나 그 느낌도 한순간, 인출할 수 있는 유효기간이 벌써 지난 지 한참이나 된 것이 아닌가. 원금 도래 5년, 그 이후 5년이 지나면 국고로 들어간다고 돼 있는 그 빳빳한 채권, 은행에 알아보니 이제는 종이쪽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하늘나라로 아버지 떠나신 지도 벌써 오래전이니 말이다. 아무리 귀한 것이라도 때맞춰 못 찾으면 종이쪽에 불과한 것을! 아버지도 오래 살아 계실 줄 알았는데, 그렇게 황망히 떠나시더니…. 살뜰히 챙겨주시던 아버지의 깊은 정이 사무쳐 정리하다 말고 솟구치는 눈물을 훔쳤다.집이 바뀌면 삶이 바뀐다고 하지 않은가. 비운 자리에 행복을 더하는 ‘신박’한 집구석 카운슬링을 본보기로 해 삶을 돌아보며 평소에 정리하는 습관을 길러야 할 것 같다.나이를 먹으면서는 욕심을 내려놓고 단순하게 생활하면서 꾸준히 육체 건강을 챙겨 활발하게 활동하고 마음을 잘 챙겨야 하리라. 기억력도 챙기고 판단력도 잘 관리해 깜빡깜빡 잊기 쉬운 것들에 대해서도 잔머리 쓰기 훈련이라도 하여 꾸준히 신경 써야 할 사항이지 않겠는가. 지금, 이 순간, 앞날을 위해 정리의 스위치를 올려보자. 절실하게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부터 차곡차곡 정리 정돈이 될 터이니.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책 정리를 하다가/ 윤일현

누렇게 뜬 시집에서 나온/ 빛바랜 흑백 명함판 사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어지러워 서가에 몸을 기댄다.// 질풍노도의 시대를/ 좌충우돌하며 돌아다녔건만./ 세월은 모든 것을 탈색하여/ 내 젊은 날들 결국은/ 5x7cm의 작은 평면 속/ 흑과 백, 명과 암으로 정리되는구나.// 세상의 모든 색채 흑백 속에 가둘 수 있지만/ 그 색채들 또한 흑백에서 갈라져 나옴을./ 밝음 끝에는 어둠이 찾아오고/ 어둠 다하면 새 빛이 돋아남을,/ 명과 백, 암과 흑만으로는/ 혁명도 사랑도 형상을 가질 수 없고/ 흑과 백, 명과 암은 서로 기대고 있음을,/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흑백의 풍경 밖으로 나와 보니// 지나온 길 아직 먼지 자욱하고/ 가야할 길 안개 속에 아득하다/ 강산이 몇 번 바뀌었건만/ 이루지 못한 꿈과 사랑/ 여전히 그대로 부여잡고 있는/ 앙상한 내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새벽별 하나 가슴에 안겨주고/ 가장 따뜻한 시로 나를 덮어준 후/ 그 시집 다시 서가에 고이 꽂아주며/ 불쑥 찾아온 현기증을 다스린다. 「시와반시」 (2015년 겨울)책은 애물단지이거나 잘해야 계륵 정도다. 공간만 차지 할 뿐 활용성이 떨어진다. 인터넷 검색이 강력하고 e북 시장까지 활성화되는 상황에서 책은 밉상이다. 그 와중에 눈까지 침침해지면 책은 좌불안석이다. 집값이라도 들썩거리는 날엔 책이 설 자리는 더욱 좁다. 여유 공간을 만들어보려고 집안을 둘러본다. 방을 가득 메운 책들이 눈을 내리깐다. 보관할 책과 버릴 책을 분류해본다. 벌써부터 생각해온 일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큰마음 먹고 일을 벌인다. 한쪽으로 완전 기운 책은 생각처럼 많지 않다. 살 땐 나름대로 살만해서 구입한 터라 막상 버리려고 하면 나중에 볼 것 같기도 하고 아깝기도 하여 망설여진다. 버리기로 마음먹어도 조금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들춰본다. 선 채로 읽다가 그 내용에 빨려 들어가 급기야 마음을 바꾸기도 한다. 좋은 책이 책장에 꽂혀있는 줄도 모르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책갈피에서 뜻밖의 물건이 발굴되기도 한다. 사진이나 단풍잎이 숨어있는 경우가 더러 있다. 가끔 빳빳한 지폐도 나온다. 고액권이었을 지폐가 이젠 화폐수집용으로 밖에 쓰임새가 없지만 마음은 즐겁다. 사진은 추억이다. 빛바랜 흑백사진을 든 시인은 그 시절로 돌아간다. 살짝 어지럽다. 잔잔한 미소가 번진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용케 견뎌낸 그녀석이 흑백 명함판에 갇혀 결연한 얼굴로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복잡한 사연들이 흑백으로 녹아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흑 속엔 모든 색이 들어있고, 백 속엔 모든 빛이 모여 있다.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오고 밝음이 다하면 어둠이 온다. 흑과 백은 서로 의지하는 관계일 뿐더러 그 근본이 서로 닿아있다. 흑만으로 표현되지 않고 백만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흑과 백이 상호 조율하고 협조해야만 사물과 사연이 담기고 정리되는 사실을 흑백사진이 생생히 증언한다. 흑백논리는 금물이라는 것을 새로이 깨친다. 그땐 오직 한쪽만 본 고집스런 외눈박이였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흑백 세상에서 컬러풀 세상으로 귀환한다. 지난날은 먼지 앉은 책처럼 뿌옇고 누런데 가야할 길은 안개 속이다. 욕망을 내려놓을 만큼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움켜쥐고 있는 앙상한 모습이 안쓰럽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흑백사진을 시집에 살짝 재워 서가에 꽂는다. 어지러운 세상이 다시 깨어난다. 현기증은 타임머신 멀미다. 오철환(문인)

당직변호사

▲10일 이종우 ▲11일 이주성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우리가 지켜야 할 ‘그’들은 누구인가

김시욱에녹 원장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하얀 눈발을 헤치며 시골마을 종착역을 향해 열차가 들어오고 있다. 깃발을 올려 정지신호를 보낸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으로 뒤덮인 간이역엔 오늘도 철도원인 ‘그’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뒤늦게 얻은 딸이 급성 열병으로 아내의 품에 안겨 싸늘하게 돌아온 날에도, 아내가 깊은 중병을 얻어 큰 도시의 병원으로 떠나던 날에도 ‘그’는 그 자리에서 열차를 맞이하고 보내야 했다. 자신은 ‘철도일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철도원이므로... 소중한 가족인 딸과 아내를 먼 하늘로 떠나보낸 시골 역에서 ‘그’는 정년을 맞이하고 열차노선의 폐지를 통보받게 된다. 쌓인 눈 위로 끝없는 눈발이 날리던 날, ‘그’는 딸과 아내가 있는 곳을 향해 떠나는 마지막 여정 속에서 눈을 감는다.서른을 갓 넘긴 시절에 필자가 보았던 영화의 장면들을 나열하면서 그 날의 기억이 새삼 가슴을 아리게 한다. 첫 딸을 낳고 내 욕망인 꿈을 위해 신림동에 머물러야 했던 상황이 영화 속 ‘그’와 감정이입이 일어난 탓인지도 모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의 의미를 그 때는 가장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자기연민인 줄로 알았다. 지독하리만치 자신의 직업과 역할에 충실한 ‘그’에게서 나는 혹여 내 자신의 면죄부를 찾고 있지 않았는지 지금에서야 의문이 든다.‘가장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 의문 속에서 경제적 부양을 최우선으로 하던 시절이 있었다.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던 5~6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 가장의 역할은 가족들의 의식주 해결에 맞춰져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잔업을 해서라도 평소보다 많은 월급봉투를 가져오길 원했다. 몸을 담고 있는 조직이나 기업의 발전이 곧 자신의 발전을 의미했고 가족의 여유로운 생활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장인정신으로 직업을 전문화하고자 하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개인적 여유와 욕망을 억누른 자기희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연스레 만들어진 결과가 전문가인지도 모른다. 흔히 ‘꼰대’와 ‘틀딱’이라 불리는 우리들의 아버지가 ‘그’들이다. 묵묵히 자신의 일이 천직이라 여기며 살아온 ‘그’들이기에 급변하는 시대 앞에 두려움도 있었으리라. ‘자유와 민주’ 그리고 ‘노동해방과 혁명’으로 들끓던 80년대엔 가치관의 혼동과 정체성에 대한 회의도 있었으리라. 가족만을 위한 그들의 희생이 가족을 등진 융통성 없는 사람으로 비난받을 때 분명 그들은 슬픔이 앞섰음이 분명하다. 깃발 하나와 호루라기로 열차를 세우고 떠나보내던 철도원인 ‘그’가 가진 슬픔처럼.OECD국가로서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넘어선지 오래다. 6.25전쟁 이후 반세기만에 이룬 성과로서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전쟁의 폐허 속 국제사회로부터 원조 받던 국가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국가로 탈바꿈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 조차하다. 이렇듯 단기간에 고도의 성장을 이룬 나라는 지구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하다는 평가도 있다. 성장의 결과로 여유로운 삶이 보장되었으며 서구식 문화의 영향으로 개인주의적인 가족 중심의 문화로 바뀌어져 왔다.하지만 그 어디에도 성장의 기반이 된 ‘그’들에 대한 찬사와 영광은 없는 듯하다. 아니, 어쩌면 애써 지워 나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세대간 갈등 속에서 ‘그’들은 어느새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무지한 세뇌교육의 대상자로 낙인을 받고 있다. 편법보다는 우직하게 조직에 몸 담아온 ‘그’들임에도 그 조직을 깨지 못한 무능한 조력자로 치부되고 있다. 과연 ‘그’들은 진정 무지하고 가정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흔히 우리는 법보다 도덕과 양심이 앞선다고 한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임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늘 충돌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법과 양심이다. 누군가의 말을 빌리면 ‘양심이 이데올로기적일 때 다른 양심의 인간에 대해 잔인하다’란 말이 있다. 이는 결코 양심이란 것이 절대선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란 것이다. 누군가를 재단하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과 그것을 지키려는 ‘그’들의 시대적 양심을 이해해야만 한다. 지금의 자유와 민주가 어느 한 집단이 만들어 온 전유물이 아니듯 ‘그’들이 만들어 온 공적도 인정해야만 한다.선로 위 열차가 서야 할 시간과 떠나야 할 시간, 그것은 약속이며 질서이다. 그것이 지금의 우리를 이끌어 온 ‘그’들의 노력이며 슬픔이었음을 기억하고자 한다.

세상은/ 김연희

황금네거리 이면 도로엔 붉은 십자가가 다섯, 입구가 가리어진 모텔이 여남은 개// 세상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폐지 리어카는/ 비에 젖고 「정음과 작약 창간호」 (2017, 그루) 김연희 시인은 강원도 태백 출생으로 201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서예·문인화가이기도 하다. 시중유화, 화중유시의 길을 찾아 묵묵히 걸으며 예술혼의 불길을 꺼뜨리지 않고 있는 시인이다. 우리 살고 있는 대구라는 큰 도시는 살기 좋은 곳이다. 특히 오래 전부터 나무를 많이 심으면서 숲이 우거진 곳이 많아 푸른 대구라고 불러도 좋을 만하다. 얼마 전 대구를 처음 방문한 이가 생각보다 교통도 편리하고 도심지가 깨끗해 아늑한 느낌을 안겨준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일이 있다. 그것은 사실이다. 대구는 살기 좋은 곳이다. 물론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상철인 3호선 하나만 보고도 서울에서 온 손님이 신기해하면서 한 번 타 봤으면 좋겠다고 했다. 3호선은 실제로 아주 편리하고 미관상으로도 나쁘지 않다. 이젠 명물이 됐다. 안전하게 오고가는 것을 보면서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단시조 ‘세상은’은 세상살이의 모순을 조심스레 풍자하고 있다. 그 비유가 간명하면서도 적절해 읽는 맛을 더한다. 초장과 중장을 이어 붙인 장면 설정을 눈여겨볼 일이다. 대구 사람이라면 익히 아는 황금네거리라는 지명이 나온다. 그 이면 도로엔 붉은 십자가가 다섯이나 보인다고 하고 또한 입구가 가리어진 모텔이 여남은 개가 있다고 진술한다. 화자는 굳이 왜 이러한 장면을 제시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보이는 대로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의도가 있다. 사랑의 상징인 십자가와 잠과 휴식의 공간인 모텔은 상반된 의미를 지닌다. 아가페와 에로스다. 어쨌거나 사랑이다. 그래서 화자는 종장 전구에서 세상은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다고 뒤틀어서 노래한다. 정말 진정한 사랑이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구현되고 있는지 문제 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쉽게 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타정신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 순간 화자의 시선은 어느 한 곳으로 꽂힌다. 즉 폐지 리어카가 비에 젖고 있는 광경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으로 넘쳐나고 있는 듯하지만, 마냥 비에 젖고 있는 폐지 리어카는 그 사랑의 혜택을 받고 있지 못한 정황이다. 이것은 생생한 현장 비유다. 단시조 ‘세상은’이 우리에게 들려주고자 하는 말은 이렇듯 의미심장하다. 입으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진정으로 어려운 이웃을 배려했으면 하는 간절한 뜻이 내재돼 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마음을 크게 열지 않으면 안 된다. 스크루지처럼 지독한 구두쇠도 종내 마음 문을 열고 크게 베푸는 것을 오래전 이야기 속에서 읽은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시인은 시로서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구호나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고급한 언어로 직조된 적절한 비유를 통해 형상화한 작품으로 세상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시인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어두운 길을 밝힐 수 있는 것이 비단 등불만은 아닌 것이다. 잘 빚어진 한 편의 소우주는 오래도록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만구성비로 그 생명을 면면히 이어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지금까지 많이 봐왔다. 일러 명작, 명시라는 작품들이다. ‘세상은’을 되풀이해서 음미해 보라. 어떤 삶을 살아가야 옳은지 두 눈으로 똑똑히 직시할 수 있지 않는가? 이정환(시조 시인)

세상 팔자 좋은 사람들  

대구시내를 벗어나는 국도는 주말인데도 차량들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휴가철이 시작된 것이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조용해 보이는 끝차선으로 옮겼다. 그런데 앞쪽에서 리어카에 빈 상자며 잡동사니들을 잔뜩 실은 노인이 90도 휘어진 허리로 힘겹게 리어카를 끌고 차선을 역주행해 오는 것이 아닌가. 모두들 차선을 양보해서 그 길은 조용했던 것이다. 왜 차선을 위반해서 길을 막느냐고 어느 누구도 시비를 거는 운전자는 없었다. 차량들이 끝차선을 비워둔 데는 이런 사연이 있었다. 성별도 나이도 구분할 수 없는 그는 마치 요즘 부동산 증세 논쟁을 팔자 좋은 사람들의 현실을 모르는 소리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묵묵히 리어카를 끌었다.부동산 3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그야말로 속전속결, 일사천리다. 국회의 관련 상임위와 법사위를 거치고 본회의까지 통과해 국무회의에서 절차를 밟아 실행하게 됐다. 이건 뭐 초등학교에서 입법 활동 모의학습처럼. 이렇게 쉽게, 간단히 처리되는 법들이 지난 정권에서 두 차례나 국회에 상정되고도 법사위 문턱조차 넘지 못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정권에 따라, 정당에 따라 그렇게 부동산 관련 정책과 시각이 달라지니 돈 모아 집 사는 것이 아니라 아파트로 돈 벌겠다는 국민이 늘어나는 것인지 이해도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싸라기 땅이라는 서울 강남에 빌딩을 갖겠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하는가보다.서울의 아파트 값은 대구 촌놈으로서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다. ‘억’ 단위를 넘어 ‘10억’ 단위의 아파트들이 예사이고, 무엇보다 몇 년 사이에 ‘수십억’원의 차익을 남겼다는, 쉽게 말해 벌었다는 이야기에는 안드로메다의 신도시 이야기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나라고 부럽지 않겠나. 월말이면 날아오는 카드명세서며 내 욕망을 절제하라고 끊임없이 견제하는 마이너스 통장의 잔고는 저런 아파트 하나 가졌으면 하는 욕심을 갖게 되는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이번에 민주당이 속도를 낸 부동산법 처리의 배경에는 청와대 식구들을 비롯한 고위 공직자들이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정보를 선점하고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모두가 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인가. 그런 사람이어야 그런 정책들을 핸드링할 자격이 된다는 뜻일까. 청와대는 다주택 소유 고위직에게 부동산 관계부처에 근무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도 했다. 팔자좋은 사람들에 대한 국민들의 위화감을 의식한 탓일 게다.국회에서 부동산을 처리하는 국회의원들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상당수가 2채 이상의 아파트를, 노른자위에 갖고 있고 그로 인해 막대한 차익을 남겼으니 그들이 부동산 관계법을 찬성할 리 만무하다. 국회의원들 재산 신고할 때 보면 전체 국민보다 평균 재산 증가율이 왜 그리 높은지 늘 의문이었다. 부동산법 논의를 하는 의원들이 국회에서 “나는 임차인입니다”라는 등 서민 코스프레하지 말고 정책을 솔선수범하는 것이 부동산 가격을 진정시키는 한 방안이라 말하고 싶다.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존중하는 자유민주주의에서 사유재산은 어떤 이유로든 보호받아야 한다. 그리고 자본과 토지에 의한 가치 창출이 노동의 가치보다 하위 개념이어서도 안 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 주호영 통합당 의원의 발언은 원칙은 맞지만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다. 더구나 부동산으로 수십억 원의 차익을 남긴 것으로 알려진 그가 할 이야기는 아니다. 집이 재산 증식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주거 기능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에서다. 더구나 색깔론까지 덧칠해서 통합당의 전신으로 국민에게 외면 받은 한국당을 떠올리게 만들어서는 안 될 일이다.반대로 이재명 경기지사의 다주택 소유 공무원에 대한 견제 정책이 많은 반대 의견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환영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경기도의 주택보급률이 100%에 달하는데도 여전히 전세 월세를 사는 무주택자가 44%나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부동산의 자유로운 거래를 허용하되 취득세와 양도세를 통한 팔자좋은 사람들의 불로소득 환수를 강조한 그의 주장에도 귀 기울일 만하다.

당직변호사

▲7일 이정훈 ▲8일 김장호 ▲9일 김재기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경제 주체에 대한 오만한 기대는 버려라

이부형현대경제연구원 이사대우갈팡질팡. 도대체 어디로 튈지 모를 수많은 부동산 대책에 온 나라가 들썩이지만, 좀처럼 문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난 7월 전국 집값은 9년 3개월 만에 가장 크게 상승해 새로운 기록들을 써 나가고 있다고 하니 문제의 심각성만 커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초유의 저금리와 풍부한 유동성, 대체 투자처 부재와 같은 이유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처럼 강력한 대책들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부동산 시장이 여전히 불안한 것에는 뭔가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자면 애당초 정책 당국의 가설이 비현실적이어서 정책효과가 발휘될 수 없었거나 일부 경제 주체들의 이기심이 극도에 달해 정책 당국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시장이 움직였던지 하는 것들 말이다. 경제 주체들의 이기심이 극도에 달했는지에 아닌 지에 대해서는 평가할 방법이 마땅치 않으니 작금의 부동산 시장 불안을 오로지 이들의 이기심 탓으로 돌린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정책 당국의 가설과 정책효과에는 이들의 이기심이 반영돼 있으니 그나마 대안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대책들을 살펴보면 정책 당국이 내세운 가장 큰 가설은 공급은 충분한데 오로지 투기세력들 때문에 부동산 시장의 불안정이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가장 먼저 제시된 처방전은 투기수요 억제책으로 가수요 차단을 통해 가격 상승 억제를 꾀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증세다. 투기세력의 핵심이 다주택자이니 이들을 세금으로 압박해 주택 매도를 통한 공급 물량 확대를 유도했다. 그 결과는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가격 상승과 매물 잠김(공급 부족) 현상이었다. 그래서 몇 차례나 공급대책도 내놓았다. 하지만 이 또한 시장 니즈와의 불일치 등으로 약발이 먹히지 않고 있다. 심지어 행정수도를 세종시로 이전하자는 계획까지 내놓았지만 시장의 기대를 바꾸기는커녕 인근 부동산 시장만 벌집 쑤셔 놓은 형국으로 만들었을 뿐이다. 급기야 서민주거안정을 위한 전월세신고제, 전월세상한제, 계약갱신청구권제 등이 담긴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임대차 3법)이 지난달 국회를 통과했지만 이 또한 전세가격 급등과 월세 전환 가속, 임대인과 임차인 간 갈등, 조세저항 등과 같은 새로운 문제를 유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처럼 그동안의 흐름을 종합해보면 지금의 불안정한 부동산 시장에는 상당히 복잡한 이유들이 혼재돼 있음이 분명해 보인다. 무엇보다 필요한 곳에 충분한 수준의 공급이 이뤄질 것이라는 시장의 기대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정책의사결정이 이뤄져 왔던 점은 이제 와서 다소 정책 방향을 선회해도 만회할 수 없을 정도의 뼈아픈 정책 당국의 실수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반면에 극도의 이기심을 가진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세력들이 일부 존재한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들 때문에 의도한 만큼의 정책효과가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지금의 혼란에 대한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만은 없다. 마치 영국의 경제학자 프랑시스 에지워스(Francis Y. Edgeworth)가 ‘경제학의 제1원리는 모든 주체가 오직 이기심에 의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한다는 것’이라면서 경제학이나 경제 현상 분석에 있어서 경제 주체(개인)의 정의나 도덕에 관한 문제의 결핍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행복과 비교했을 때 타인의 행복이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행복만큼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도 아니다’는 것을 인정했듯이 정책 당국의 정책의사결정으로 아무리 자신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경제 주체라도 이타적으로 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오만한 기대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이제 어느 정도 문제의 본질이 보이는 것 같지 않은가? 정책 당국은 늘 정책의사결정에 앞서 의도한대로 행동하는 선량한 경제 주체들이 돼주길 원하지만 각 경제 주체들은 이기심이라 해도 좋을 자신의 행복 추구가 우선이기 마련이다. 만약 앞으로도 이런 점들이 정책의사결정 과정에서 고려되지 않는다면 정책실패는 반복될 수 밖에 없다.

묘비명 고치기

윤일현지성교육문화센터 이사장휴가 기간에 기 드 모파상의 단편 소설을 다시 읽었다. 죽도록 사랑했던 여자가 갑자기 죽고 난 뒤 한 남자가 겪은 일을 다룬 ‘고인’이 새롭게 와 닿았다. 소설 속 남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사랑은 언제나 같은 단 하나의 이야기만 갖고 있다. 나는 그녀를 만났고, 그녀를 사랑했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일 년 동안 나는 그녀의 시선 속에서, 그녀의 옷 안에서 그녀의 말속에서 살았다. 밤인지 낮인지 구별도 못 할 정도로, 내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도 없을 정도로, 내가 이 지구에 있는지 아니면 어떤 다른 곳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서 오는 모든 것에 의해 완벽하게 싸이고 묶이고 사로잡힌 채 살았다.”그렇게 사랑하는 여인이 비 내리는 어느 저녁, 몸이 젖은 채 집에 돌아와서는 몸져누웠다. 고열이 났지만 빛나는 시선은 슬퍼 보였다. 안타까운 마음에 말을 걸자 그녀는 답은 했지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그녀는 죽었다. 그녀를 묻고 파리로 돌아온 남자는 그녀를 잊을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을 정도로 격렬한 슬픔이 되살아났다. 어느날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묘지로 가고 있었다. 그녀의 묘지 대리석 십자가에는 “그녀는 사랑하고 사랑받다 잠들었노라”라고 적혀 있었다.남자는 그날 밤 묘지에 머무르면서 죽은 자들이 관을 박차고 나와 자신의 비문을 고치는 장면을 목격한다. 남자가 앉아있던 묘지의 주인도 밖으로 나와 “여기 쟈끄 올리방이 쉰한 살의 나이로 잠들다. 우인들을 사랑했고, 정직했으며, 선량한 그는 주님의 평화 속에서 잠들었노라”라는 비문을 끝이 날카로운 돌로 긁어 지웠다. 그리고는 “여기 쟈끄 올리방이 쉰한 살의 나이로 잠들다. 유산상속을 바라면서 가혹함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재촉했고, 아내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아이들을 괴롭혔고, 이웃을 속였고, 기회만 있으면 도둑질을 한 그는 비참하게 죽었노라.”라고 고쳤다.고쳐쓰기를 마치자 시체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작품을 감상했다. 남자는 주위를 둘러봤다. 시체들이 무덤에서 나와 가족이 묘비에 새긴 거짓말을 지우고는 진실을 써넣고 있었다. 모두가 주위 사람을 괴롭힌 가증스럽고 파렴치하고 위선적인 거짓말쟁이였으며, 간사한 모략꾼이며 탐욕스러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19세기의 소설이 21세기인 지금의 이야기로 절실하게 다가왔다. 내가 죽고 난 뒤 나에게도 틀림없이 일어날 일이었다. 갑자기 특정인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좋아하는 ‘ㅇ파, ㅇ빠’가 떠올랐다. 이들 역시 지금 지지하는 특정인이 무소불위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을 때는 이렇게 외칠 것이다. “내가 지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이고 세상에는 단 한 사람을 지지하는 이야기만 존재한다. 나는 우연히 그를 만났고, 그를 사랑했다. 그것이 전부다…나는 그에게서 오는 모든 것에 의해 완벽하게 싸이고 묶이고 사로잡힌 채 살았다.” 그가 죽으면 “임은 고통받고 억압받는 모든 이들의 벗이었으며,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으며 청빈하고 겸손하게 살았다. 임은 우리 모두의 우상이고 영웅이었다. 우리의 영원한 존경과 사랑 속에서 여기 잠들다”와 비슷한 내용의 글을 새길 것이다.남자는 묻혀있는 모두가 묘비를 고치는 것을 보고 그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시체와 해골 사이를 뛰어다녔다. 수의로 덮여 있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마침내 그녀를 찾았다. 그녀도 자신의 묘비를 이렇게 고쳐 놓았다. “어느날 불륜 관계를 맺으러 나갔다가 비를 맞아 감기에 걸려 죽었노라.” 소설은 “이튿날 아침, 정신을 잃고 무덤 근처에 쓰러져 있는 나를 사람들이 떼 메고 왔다고 한다”로 끝을 맺고 있다.“나는 순진한 추종자들을 앞세워 반대파를 공격하면서 나 자신과 나를 감싸고 있는 패거리의 이익만 추구했으며 정직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았다. 나는 세상을 크게 한판 속였고 탐욕과 위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노라.” 이렇게 고쳐진 묘비를 발견하고는 망연자실할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 추종자들을 떠올리며 모파상 자신의 묘비명을 다시 음미해 본다. "나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

대구일보 손님

◆본사▲곽상도 미래통합당 대구시당 위원장 ▲홍창훈 〃사무처장 ▲김시숭 〃대변인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그리운 우물/ 이연주

~우물가의 추억은 풋사랑일 뿐~…두섭은 노모를 모시고 사는 노총각이다. 근오는 한 마을에 사는 부랄 친구로 두섭과 형제처럼 지낸다. 그 역시 노총각. 시골 촌구석으로 시집올 여자가 없다. 그나마 근오는 전문대학까지 나온 까닭에 중학교를 중퇴한 두섭보단 조금 낫다. 노모를 모시고 촌에서 살아야 하는 조건 때문에 번번이 혼사가 깨졌다. 근오는 지난해부터 대학동기와 사귀고 있었지만 두섭은 최근에야 그 사실을 알았다. 섭섭한 감정을 넘어 배신감마저 들었다. 친형제보다 더 막역하게 지내온 사이에 그 엄청난 비밀을 장기간 숨겼다는 사실에 격노했다. 두섭이 근오에게 그 일을 캐물었을 때, 근오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깊고 진지했다. 근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두섭은 더 이상 그 일을 추궁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 그 후, 근오는 가끔 두섭에게 그 여자에 대한 근황을 들려주었다. 그러던 차에 두섭도 고모에게서 중신이 들어왔다. 애 둘 있는 이혼녀로 어릴 적 우물가에서 보고 가슴에 담아뒀던 여자다. 전학 가는 바람에 잊고 지냈던 풋사랑이다. 굳이 말하자면 첫사랑일지도 모른다. 노모와 고모는 두 사람의 혼사를 성사시키고자 과할 정도로 그를 들볶아댔다. 그러나 두섭은 그녀와의 만남마저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 와중에 두섭은 근오가 사귀던 그 여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질투와 섭섭함으로 감정이 축축하게 달아올랐다. 그래도 결혼을 축하해 줄 생각에 술을 사들고 근오네 집으로 갔다. 본의 아니게 근오와 약혼자의 대화를 엿듣는다. 무식한 친구와 만나지 말라는 약혼자의 말에 그의 절친 근오는 놀랍게도 순순히 맞장구친다. 두섭이 장가든다는 소문 때문에 옹고집 근오 모친이 결혼 후 자식 분가를 전격적으로 허락해줌으로써 그들 결혼이 성사된 충격적인 내용도 알게 된다. 경황없는 가운데 두섭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와서 그 편지를 또 꺼내 읽는다. 벌써 몇 번째 읽어 보는지 모른다. 맞선 보자는 그 여인의 편지다. 한 달 후 이민 간다며 부디 좋은 여자 만나 행복한 가정을 꾸미라는 내용이다.…농촌총각에게 시집갈 처녀가 거의 없는 현실이 처연하다. 짝짓기는 본능이다. 이 본능 앞에 죽마고우도 헌신짝이다. 이 엄청난 희생은 차치하고 농사엔 돈과 시간과 땀이 들어간다. 그에 비한다면 그 대가는 초라하다. 인간생존에 불가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농산물의 상대가격은 분노할 수준이다. 상대적 희소성이 낮은 점도 장애요인이지만 꼭 먹고 살아야 하는 생존필수품이라는 점이 역설적으로 더 큰 문제다. 저렴한 가격으로 먹거리를 공급해야 하는 필연적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 불만과 본능적 울분은 해소할 길이 없다.맺어질 수 없는 사정을 미리 알고 있는 그에게 노모와 고모의 과도한 설득과 압박은 갈등을 최고조로 끌고 간다. 그의 집 우물을 좋아했던 첫사랑을 다시 만난 때는 그 우물을 시멘트로 덮고 난 후다. 우물 뚜껑을 깨부수려고 해머를 내리치는 모습은 그래서 절절하고 애처롭다. 해머 자루가 부서진 장면이 안타깝게 다가온다. 우물은 첫사랑의 추억이다. 어릴 때 길렀던 고양이가 쥐약을 먹고 떠나갔다. 친하게 지내던 앞집 고양이마저 쥐 맛을 본 후, 부랄 친구가 그랬듯이, 그를 등졌다. 고양이는 우정의 상징이다.문학이 어휘를 갈고닦는 언어예술이라면 이연주는 그에 부응하는 흔치 않는 작가다. 낯선 우리말을 풀어내는 화려한 필담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리운 우물’을 독파하려면 필히 우리말사전을 옆에 펴둬야 할 터이다. 오철환(문인)

당직변호사

▲6일 이정진 ▲7일 이정훈 김지혜 기자 hellowis@idaegu.com

살겠다는 소리/ 엄정화

박자가 기막히다/ 보내온 녹음 파일// 서울 촌놈 들으라고/ 물소리 풀벌레 소리// 묘하게/ 끼어든 맹꽁이/ 마디마디 절절한「정음과 작약 창간호」(2017, 그루)엄정화 시인은 서울 출생으로 2017년 ‘한국동서문학’ 신인상 시조 당선으로 등단했다. 그의 작품은 모던하다. 사물이나 세계에 대한 접근방식이 이채롭고, 남다른 사유의 깊이로 말미암아 철학적이다. 인간의 내면을 향한 혹은 삶을 향한 이러한 예리한 시선은 개성적인 시의 모습으로 형상화돼 존재론적 성찰에까지 이른다. 시의 소재도 일반적이지 않다. 뜻밖의 대상을 포착해 체현하는 일에 능숙하다. 그 결과물은 늘 우리의 삶과 깊이 접맥돼 있다.우리는 날마다 숨 쉬며 살아간다. 말할 수 없는 이의 크신 손길을 통해 여전히 숨결이 허락됐기에 생명을 유지하고 있고, 일상생활을 영위한다. 날마다 거리에는 어디론가 바삐 달려가는 차들로 붐빈다. 일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므로 열심히 생업에 종사한다. 살겠다는 소리, 살겠다는 몸짓, 발걸음, 손놀림들이다. 이 땅에 발 딛고 사는 복을 받았으니 부지런히 살아가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어려운 일들이 산 첩첩 물 첩첩이다. 비단 사람뿐이랴. 꽃과 풀과 나무, 여러 곤충과 새, 동물들도 저마다 살기 위해 가진 힘을 다한다. 이따금 소리를 내기도 하고 몸을 흔들어대기도 한다.‘살겠다는 소리’는 그러한 생각을 담은 시편이다. 요즘은 휴대전화기로 온갖 자료를 쉽사리 주고받을 수 있다. 그만큼 편리해진 세상이다. 화자의 지인이 보내온 녹음 파일은 박자가 기막히다. 듣기 좋다는 뜻일 것이다. 서울 사람 들으라고 보내온 파일에는 물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섞여 있다. 그런데 그것만이 아니다. 다른 소리도 들린다. 맹꽁이 울음이다.맹꽁이는 양서류로 개구리목 맹꽁잇과에 속한 한 종인데 몸길이는 40㎜ 내외다. 뚱뚱하고 머리는 작으며 황색 바탕에 청색 또는 흑색의 무늬가 있다. 비가 오거나 날이 흐릴 때면 울음주머니를 가지고 있어서 요란하게 운다. 그 맹꽁이가 묘하게 끼어든 것이다. 그런데 맹꽁이 울음을 두고 화자는 마디마디 절절하다고 말하고 있다. 삶은 절박하고 절절한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겠다. 간절함의 결핍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만큼 절절한 맹꽁이 울음을 통해 우리는 무언가를 깨달아야 한다. 물소리를 더욱 가까이 해야 하고, 풀벌레가 우는 들길이나 숲길을 걷는 여유로운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 며칠 전 늦은 저녁 무렵 교회당이 보이는 언덕바지 숲에서 매미울음과 함께 개구리 합창소리가 들렸다. 도심지에서 들려오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오랫동안 마음을 울렸다.약삭빠른 데라고는 전혀 없어 하는 짓이나 말이 답답한 사람을 놀림조로 이르는 말이 맹꽁이인데 앞으로는 이 말을 그런 뜻으로 써서는 안되겠다. 쟁기발개구리, 라고도 부르는 맹꽁이는 멸종위기 야생생물이다. 사라지지 않도록 잘 보살펴야 마땅한데 사람을 두고 그렇게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겠다. 지구촌에 있는 모든 생물뿐만 아니라 무생물까지도 소중한 존재다. 흙이나 돌과 바위가 생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모두 미생물을 품고 있고 생명의 토대가 아닌가?단시조 ‘살겠다는 소리’는 확대해서 생각하면 환경 문제도 내포돼 있다. 간절함과 더불어 살기 위해 이렇듯 갖은 정성을 다 쏟는다면 삶의 질은 분명히 달라질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살겠다는 소리’를 다시금 조용히 읊조려본다. 이정환(시조 시인)

물(水)의 가르침 간과하지 말라

박운석패밀리푸드협동조합 이사장사람을 하찮게 보거나 쉽게 생각할 때 ‘물로 보다’는 말로 표현한다. 낮은 데로 순응하며 흐르는 물의 부드러움만 보고 관용구로 쓰는 말이다. ‘물 건너가다’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어 이뤄지기 어렵게 된 상황을 말한다. 어떠한 조치도 할 수 없는 상태다. 돈 혹은 물건을 함부로 쓰고 낭비하는 것은 ‘물 쓰듯 하다’로 표현한다. 요즘 정치권에서 매일 쏟아져 나오는 ‘물타기’는 본질을 외면하고 논점을 흐리는 행위를 말한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특종을 놓쳤을 때 ‘물먹었다’고 한다. 태도가 흐릿하고 분명하지 않음을 비꼬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이라는 말도 있다.이처럼 물과 관련된 부정적인 관용구가 너무 많다. 1980년대 말에는 나약한 지도자라는 뜻으로 대통령에게까지 ‘물○○’라는 별명을 붙일 정도였다. 아마 사람들이 물을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인 듯하다. 아니면 역행하지 않고 늘 낮은 곳으로 흐르는 조용한 이미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하지만 예로부터 물과 관련된 가르침을 설파한 경우가 많았다. 노자(老子)가 대표적이다. 노자는 도(道)의 세계를 물에서 찾았다. 상선약수(上善若水)는 중국의 성인으로 불리는 노자가 쓴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는 뜻이다.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 중 하나가 물처럼 사는 것이라는 말일 게다.그러면서 물이 가진 7가지 덕목을 이야기한다. 먼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겸손’의 덕과 막히면 돌아가는 ‘지혜’의 덕이다. 혼탁한 물마저 받아주는 ‘포용력’, 어떤 그릇에도 담기는 ‘융통성’, 바위마저 뚫는 ‘인내’, 폭포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유유히 흘러 끝내 바다를 이루는 ‘대의’가 나머지의 덕이다.물처럼 유연하게 사람들을 포용하고 옳고 그름을 따져 용기있게 대처하라는 가르침이다. 낮은 데로 흐르는 물처럼 큰 뜻을 거스르지 않고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뜻이다.그렇지만 물이 부드러움의 상징이라고 해서 절대로 허투루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물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아마 물처럼 무섭고, 물처럼 대단한 건 없을 듯하다. 아니다. 물은 늘 숨죽이고 흐르는 것만은 아니다. 어느 한순간 깨어나 휘몰아치는 게 물이기도 하다.그래선지 물에서 삶의 지혜를 깨우치는 말이 많다. 교수신문이 2016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꼽은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비유가 그 중 하나다. 임금은 배이고 백성은 물이라는 말이다. 배는 물의 힘으로 떠있다. 배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물이지만 물은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순자(荀子)에 나오는 글귀다.음미해보면 이보다 무서운 말은 없을 듯하다. 배가 방향을 제대로 잡고 순항하면 물은 순응하며 그 배를 떠받든다. 하지만 배가 방향과 길을 잃으면 배를 전복시키는 것 또한 물이다. 우리는 이미 지난 정권에서 이를 경험한 바 있다. 올바른 정치에선 잘 따르던 국민들도 잘못하는 정치엔 반드시 저항을 해 정권마저 바꾼다는 얘기다.잠시 눈을 현실로 돌려보자. 과연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이런 물의 가르침을 잘 따르고 있는가.먼저, 지금 정치권은 온통 물타기 주장들만 난무하고 있다. 옳은 일이건 아니건 중요하지 않다. 군중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위험한 여론몰이만 있을 뿐이다. 오직 자신들에게 불리하면 논점을 흩트려 상대를 깎아내리는 데 혈안이다. 이런 싸움은 국민들을 물로 보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렇게 한심하게 말장난만 하고 있는지. 그러다보면 정작 중요한 화합은 물 건너가고 국민들을 위한 정책 또한 떠내려가기 마련이다.정치권만 그런 게 아니다. 현재 우리들의 삶은 어떤가. 노자의 도덕경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가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물처럼 낮은 자리보다는 좀 더 높은 자리를, 돌아가기 보다는 질러가기를, 상대를 포용하기보다 배척을, 부드러움보다 강함만을 추구하고 있다.그래선지 요즘 더욱 ‘상선약수’의 구체적 내용인 ‘물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다만 순리에 따라 흐르는 물길을 막는다면 언젠가는 둑은 터지게 마련이다. 물을 ‘물로 보지 말라’는 노자와 순자의 가르침이다.

“소설 쓰시네” 유감

오철환객원논설위원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한 야당의원의 질의에 대해 법무부장관이 “소설 쓰시네”라고 말하자 그 국회의원이 “…소설가가 아닙니다”고 응수했다. 이 장면을 보고 ‘소설을 쓰느냐, 마느냐’를 갖고 왜 국회에서 생뚱맞게 승강이를 할까, 의아했다. 여기서 장관의 “소설을 쓴다”는 말은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 반면에 국회의원이 응수한 “소설가가 아니다”라는 말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된다. 우선 소설 쓰는 사람이 소설가인데 자신을 보고 소설 쓴다고 하니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란 해석이 가능하다. 소설의 참뜻을 왜곡하지 않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리고 소설을 ‘근거 없는 거짓말’이란 의미로 쓴 장관의 의도를 그대로 받아 자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소설가’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란 해석도 가능하다. 소설에 대한 부정적이고 차별적 함의가 그 기저에 깔려 있다. 물론 소설가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을 포괄하는 중의적 시각으로 볼 여지도 배제할 순 없다. 세간의 이슈가 된 위 사안에서 올바른 언어 활용은 국회의원의 말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의 경우다. 어쨌든 국회에서 발생한 지도층 인사들의 한심한 작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소설은 남을 속여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악의적인 헛된 거짓말도 아니고 근거 없는 이야기를 꾸며내어 공갈·협박하거나 자기주장의 관철을 꾀하는 궤변도 아니다. 소설은 ‘있을 법한 그럴듯한 이야기’이거나 ‘참말보다 더 참말 같은 픽션’이지만 그러한 픽션을 통해 ‘가짜를 진짜라고 믿도록 속이려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 모두 그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소설을 읽는다. 소설은 다양한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독자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하나 뿐인 인생을 폭넓게 관조할 수 있게 하고 가능한 한 알차고 보람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삶을 간접 경험함으로써 지난 삶을 성찰하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를 알차게 설계할 수 있다. 따라서 거짓말은 이기적인 의도를 갖는 임시방편적인 사회악이지만 소설은 인생이나 그 단면을 창조해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는 예술작품이다. 소설과 거짓말의 기본적인 차이도 인식하지 못하는 작자가 정의를 구현해야 할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실로 참담할 따름이다.소설가는 달콤한 세속적 가치를 애써 외면한 채, 인간의 본질이나 삶의 참모습에 천착하면서 외로운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다. 금전만능이 판치는 세상에서 문화적 자존감 하나로 버티는, 잇속 없는 사람이다. 글 쓰는 일을 소명으로 여기면서 피 말리는 창작에 매진하는, 영혼이 자유롭고 순수한 사람이다. 이런 순진한 사람들을 왜 느닷없이 정치판에 무단히 끌어들여 뭇사람들 앞에 우사를 주는지 알 수 없다. 이런 무고한 사람들에게 왜 뜬금없이 모욕적인 말을 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모를 일이다. 소설을 쓸모없는 나쁜 거짓말로 폄훼하고 수많은 카메라가 지켜보는 상황에서 오직 명예만 바라보고 정진하는 사람들을, 사기를 진작시켜주지 못할망정, 아무 생각 없이 유린한 일은 추악한 갑질에 다름 아니다. 개념 없는 정치인들의 사려 깊지 못한 언행으로 묵묵히 정진하는 예술가들에게 공연히 모욕감이나 자괴감을 주지 않았는지 우려스럽다. 소설을 ‘헛된 거짓말’로 보는 삐딱한 의식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소설가들이 졸지에 항간의 웃음거리로 희화화된 상황을 본다면 연극이나 영화 등 다른 예술장르에 대한 그들의 시각도 충분히 미뤄 짐작된다.정의의 수호자라는 사람이 국정을 논하는 공식적인 자리에서 소설가를 ‘말도 되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으로 비하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모습은 그야말로 추하고 천박하다. 열악한 창작여건 아래 고군분투하는 소설가들을 거짓부렁이 사기꾼인양 근거도 없이 매도한 일은 입이 열 개라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문화예술에 대한 차별적이고 천박한 위정자의 시각을 은연중에 드러낸 것 같아 몹시 우울하다.‘지탄받는 나쁜 거짓말’을 ‘소설 쓰는 일’에 빗대어 비아냥대는 잘못된 말버릇이 언제부턴가 항간에 간간이 있어왔다. 이번 사건을 기화로 소설을 근거 없는 거짓말로 비유하거나 문화예술을 턱없이 얕잡아보는 그런 풍조가 말끔히 사라졌으면 좋겠다. 제4차 산업혁명시대 글로벌 사회엔 문화예술이 곧 생명력이자 경쟁력이다. 문화예술은 단기간에 육성되는 사항이 아니다. 영양가 없고 대책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문화예술인은 인류의 행복에 이바지하는 사람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